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냉정한 리더와 공감의 지도자

<역린>의 흥행이 만만치 않다. 시사회 이후 언론의 뭇매를 맞았던 것에 비하면 의외다. 정조라는 소재, 현빈이라는 주연 배우가 무색할 정도의 혹평이 많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언론이 지적한 영화적 단점들이 오히려 흥행의 추동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늘어지는 스토리, 무게중심이 분산된 배역들, 지나치게 감정적인 인물들. 이런 평가들을 바탕으로 <역린>을 이야기하자면 <역린>은 지루하고, 산만하고, 감정과다인 작품이 된다.

하지만 단점은 장점이 되기도 한다. 거꾸로 말하면, <역린>은 사소한 인물들까지 보듬는 공감형 사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대중적 호응을 떠오르게 한다. <광해, 왕이 된 남자>에 그려진 ‘광해’는 왕후의 웃음을 위해 노력하는 소박한 광대였다. 웃음으로 권력을 살 생각도 없었다. 다만, 아름다운 여인이 환하게 웃는 것, 그 소박한 바람이 곧 관객들이 바라는 따뜻한 군주의 요건이었다.

<역린>에 그려진 정조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어떤 정조보다 감상적이다. 정조뿐만이 아니다. <역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여러 번,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그 눈물은 대개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상책과 정조가 나누는 세 번의 문답 장면이 그렇다. 정조는 뼈아픈 질타를 던지며 노여워하지 않는다. 그는 상책과의 추억을 되짚으며 눈물을 흘린다. 문답이 확인하는 내용도 둘만의 공감대다. 정조는 상책의 고통을 함께 느끼기에 흐느껴 운다. 상책의 눈물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눈물은 곧 공감의 눈물이다.

공감을 뜻하는 영단어 compathy는 어원상 함께를 뜻하는 com과 고통을 뜻하는 pathos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감이란 바로 아픔을 함께 느끼는 것을 지칭한다. 고통을 나누지 못하는 공감은 진짜 공감이 아니라는 의미다.

인간의 상상력이 지닌 가장 놀라운 기적이 있다면 바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다움의 핵심이야말로 공감과 연민의 능력일 터다.

내가 아픈 만큼 상대도 아플 것이다. 이 근본적인 역지사지가 바로 공감의 출발이다. 우리는 군주가 냉정하고 초연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공감없는 처연함은 냉정한 무감각과 다르지 않다. 공감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진정한 공감은 결국 느껴진다. 이런 <역린>의 메시지는 <중용> 23장으로 압축된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 결국 그 정성이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 정성과 최선, 그것이 곧 리더의 자질이다.


영화 <역린>의 한 장면.(출처 :경향DB)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자책하는 군주를 여럿 만날 수 있다. 1400년 10월 한 달 동안 연일 우박과 우레가 내리치고 급기야 12월22일에는 수창궁에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 군주였던 정종은 “나의 허물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렬히 나 자신을 책망한다”고 자책교서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27년 후 가뭄이 들자 세종 역시 자신을 꾸짖는 교서를 내렸다. “이는 모두 과인의 부덕함에서 비롯된 것이니, 내가 반성하며 스스로를 자책하기를 그만둘 수가 없다.” 자책교지는 공감의 표현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지도자는 나라를 이롭게 하는 자가 아니다. 맹자의 말처럼 위아래가 모두 이로움만을 추구하게 되면 나라는 위태롭게 될 수밖에 없다. 지금껏 우리는 이로움만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다. 이롭기만 하면 그것이 덕이자 선이 되는 시기는 끝났다. 책임보다 더 먼저여야 하는 것이 바로 공감이다. 공감에서 출발한 책임은 그 결과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기 때문이다.

<역린> 속의 정조는 굴욕에 치를 떨며 작은 전각에서 쪽잠을 청하는 인물이다. 그는 고통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고, 울 줄도 안다. <역린>의 악역들이 모두 공감의 능력이 떨어지는 인물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정순왕후는 아비 잃은 정조의 상처나 남편을 대가로 치러야했던 혜경궁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가 물을 청할 때 보란 듯이 음식을 삼켰다는 구순복이라는 악역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한다.

지금 관객들이 원하는 리더의 모습은 충분히 울고, 충분히 감정을 보여주는 공감의 지도자다.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한 리더가 아니라 공감하는 리더, 표정을 숨기는 초연함이 아니라 함께 슬퍼하고 굴욕에 몸을 떠는 정서적 리더. 책임을 져주는 지도자가 아니라 공감하기 때문에 자책할 수밖에 없는 지도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공감의 파트너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