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우아한 거짓말의 아픈 거울

단톡. 단체 카톡의 줄임말이다. 일본 아이치현의 도시 가리야에서는 저녁 9시 이후 휴대전화 사용이 금지된다. 휴대전화 사용 금지의 대상은 바로 어린이들이다. 단톡과 휴대전화라는 두 개의 명사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단체 카톡방에 초청하지 않기, 이것이 바로 요즘 아이들이 서로를 왕따시키는 방법이다. 스마트폰을 뺏어서라도 왕따를 줄이고 싶은 마음, 일본의 규제 법엔 어른들의 조바심이 묻어난다.

“눈치채면 안되니까, 언니라고 부르자.” 왕따의 대상을 앞에 두고 나머지 아이들끼리 키득거린다. 눈치를 챈 아이가 성급히 주변을 둘러보지만, 영악한 주모자는 “언니, 언니 이야기야”라며 뻔한 거짓말을 한다. 순간 그곳은 작은 역할극의 무대가 된다. 주동자가 있고, 적극적 공모자가 있으며 이도 저도 편들지 않는 중립적 인간과 아예 무관심한 유형도 있다. 주인공은 바로 왕따의 대상, 아이는 자신이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만 도리가 없다. 영화 <우아한 거짓말>에 등장하는 한 장면이다.

영화라니 다행이다 싶다. 하지만 이미 현실은 더 멀리 가 있다. 잡는 순간 손에서 빠져나가는 활어처럼 아이들만의 폭력적 세계는 어른의 짐작을 늘 초과한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더 섬뜩한 심정일 테다. 적어도 내 아이만은 저 다수의 역할 중 하나이기를 이기적으로 바랄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왕따는 최근의 문제만은 아니다. 지금의 기성세대들도 어린 시절 알게 모르게 특정한 급우를 외면하곤 했다. 지독한 가난의 흔적을 묻히고 다닌다거나 약간의 장애가 있는 친구들이 여기에 속하곤 했다.

차이점은 과거엔 누구도 ‘왕따’와 같은 자극적 호명을 붙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름을 붙이는 것과 그냥 두는 것 사이에는 굉장히 큰 간극이 있다. 알튀세르의 말처럼 호명은 그 자체로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다. 어떤 존재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이름은 일종의 주술이 된다.

왕따라는 호명도 그렇다. 아이들의 고백에 따르자면 왕따는 마치 돌림병처럼 반을 휩쓴다고 한다. 왕따라는 호명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그 여린 사회가 진통을 겪는다. 수건돌리기처럼 왕따라는 호명은 유령처럼 부착될 대상을 탐색한다. 누군가 왕따라고 불려야만 안심할 수 있는 사회, 그래서 아이들은 부지런히 왕따의 주체 편에 선다.


영화 <우아한 거짓말>의 한 장면



우리 사회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이 복잡다단한 관계를 학교폭력이라는 두리뭉실한 이름에 가둬두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아이들이 체감하고 있는 폭력의 수위를 결과론적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금껏 영화로 다뤄진 학교폭력 소재들만 봐도 그렇다. <6월의 일기>나 <응징자> 같은 작품에서 학교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으로 나뉘어 있다. 이분법은 관계의 전도로 해소된다. 과거의 피해자가 현재의 가해자가 되어 복수를 하면 되는 것이다.

복수야말로 가장 감각적인 해결이겠지만 한편 가장 무력한 자기위안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복수는 뒤늦게 피해의 전리품을 떠안게 된 부모들의 몫으로 그려진다는 걸 주목해야 한다. 아이가 당한 폭력을 부모가 되갚아주는 것, 그것은 아주 유아적인 판타지이다. 그리고 이야말로 공적인 문제를 사적인 범주 안에서 해결하는 미봉책이다.

또 다른 문제는 대개 이러한 논의들이 어른들끼리 공유된다는 점이다. <우아한 거짓말>을 교원이나 부모님 대상으로 시사하는 경우도 여기에 속한다. 왕따와 학교폭력을 다루는 영화를 보면서 어른들은 새삼 아이들의 현실을 알게 되고 그 고통도 통감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이런 영화를 보고, 느껴야 할 것은 바로 학교폭력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아이들이어야만 한다. 냉정하게 말해, 어른이 직접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모르는 것도 죄이다. 아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에게 폭력을 가하고 상처를 입는지 알아야만 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고통을 너무 늦게 안 후 아프다고 해서 그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아한 거짓말>이 기존의 학교폭력 영화에서 한 걸음 나아간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이 무력하다는 자인이다. 언니, 엄마가 폭력의 대상이 된 동생과 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그 아픈 결과를 무겁게 가져가야 할 뿐이다.

어렵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근본적 전회이다. 사태를 해결하는 결자가 아니라 그 구조를 파악하는 예견과 예방이 필요한 것이다. 폐쇄회로(CC)TV를 달고 감시한다고 해서 아이들 사이의 폭력적 게임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학교폭력은 아이들이 느끼는 불안의 징후이다. 과연 무엇이 이토록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든 것일까?

과연 불안을 이기기 위한 강박적 게임은 아이들만 하고 있는 것일까? 성급히 타자를 호명함으로써 냉큼 다수의 틈에 속하고 싶은 마음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소수의 이름에 외면하고픈 것들을 가둬두는 어른들 역시 피로한 게임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아이들을 계도함으로써 어른들은 슬쩍 반성의 주체에서 거리를 둔다. 하지만, 아이들은 가르치고 계도할 대상이 아니다. 아이들은 우리의 아픈 거울이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