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독해진 영화가 그려내는 희망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독해졌다. 결말 때문이다. 힘겹게 살아나온 희생자를 감독은 사지로 돌려보냈다. 서스펜스를 설명하는 훌륭한 예시가 되는 장면이 여기서 등장한다. 피해자 여성은 가까스로 도망쳐 나와 동네 가게에 몸을 숨긴다. 마침, 훈방된 용의자 4885가 담배를 사기 위해 그곳에 들른다. 슈퍼마켓의 아주머니도, 방안에 숨어 있는 피해자도 모르고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와 그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관객들은 알고 있지만 도리가 없다. 다만, 침묵의 목격자처럼 그 과정을 목도할 뿐이다. 그렇게, 관객은 무력해진다.

<추격자>가 잔혹한 이유는 선한 목격자 역할을 맡은 관객에게 허용된 최소한의 판타지를 지워버렸다는 데 있다. 희생자가 구출되는 결말을 케케묵은 페이지라며 찢어버린 것이다. 이후, 이 무력한 관찰자로서, 관객들은 여러 번 스크린 앞에 호출되곤 했다. 피해자를 구하지 못하는 게 사실적인 재현으로 받아들여졌고 범죄의 양상은 더 잔인해졌다. 그렇게, 우리는 스크린 앞에서도 무력한 시민이 되어 갔다.

범죄는 사회의 메타포이다. <살인의 추억>이 기억에 남는 까닭은 미해결의 사건이라서가 아니라 1980년대의 사회사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범죄가 특정한 시기에 종종 영화화된다면 이는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맥락이 된다. 최근 개봉한 두 작품, <방황하는 칼날>과 <한공주>에서 다뤄진 범죄만 해도 그렇다.

두 사건은 모두 청소년 성범죄를 소재로 삼고 있다. 주인공이 피해자 측이라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하지만 두 작품은 현실과 환상만큼이나 그 차이가 뚜렷하다. <방황하는 칼날>이 환상이라면 <한공주>는 현실에 더 가까울 듯싶다.

두 영화는 모두 동년배 소년들의 범죄 피해자가 된 소녀들을 다루고 있다. 한 소녀는 살아 있고 다른 한 소녀는 결국 녀석들에게 생명마저 빼앗겼다. 그렇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끔찍한 사건에서 요구되는 관객의 자리는 대개 피해자의 부모 역할이다. 그런 점에서, 죽은 딸에 대한 복수에 나서는 <방황하는 칼날>은 관객의 환상을 거둬준다. 이런 점은 원작이 되는 소설 <방황하는 칼날>에 더 분명히 드러난다. 소설은 피해자의 아버지를 화자로 선택하고 있다. 독자들은 ‘그’의 목소리에서 가해자들을 직접 처단해야 하는 당위성을 듣게 된다. 그의 논리가 곧 소설의 논리이며 독자들은 그를 통해 사태를 파악하게 된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이렇게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할 입이 있다.

하지만 <한공주>는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관객을 어디까지 데려가느냐이다. <방황하는 칼날>의 주인공은 우연히 딸아이의 살해 과정을 녹화한 동영상을 보게 된다. 아버지의 눈에 비친 영상은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도 전달된다. 이 목격은 그의 살인에 대해 관객의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되어준다. 관객은 분노한 아버지의 심리에 전폭적으로 공감하기 때문이다.


영화 <방황하는 칼날>의 한 장면.


영화 <한공주>의 한 장면.

그런데, <한공주>에서는 사건이 거의 재현되지 않는다. 아니 겨우 진술된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공주는 피해 당사자이다. 당사자에게 고통은 아직 문자화될 수 없는 추상적 덩어리이다. 정리된 문자로 서술하기엔 공주에게 그 고통은 너무나 현재적이다. 다친 몸을 치료해야 하고, 법정에서 스스로가 피해자임을 증명해야 한다. 더구나 그 고통을 누군가에게 호소해 연민을 얻을 여유도 없다. 지금, 그녀에겐 일단, 살아남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방황하는 칼날>의 아버지에게 ‘입’이 있었다면, 그녀에게는 ‘입’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살아가고 있는 영화 속 시공간은 스크린의 장벽이 무색하리만치 사실적이다. 가해자에게도 살아갈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냐며 주장하는 그 폭력적 손길 가운데 우리가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우리는 입이 없는 자들의 목소리는 듣지 못한다. 마치 녹화되지 않은 영상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소리 죽여 우는 자들의 목소리엔 귀 기울이지 못한다. <한공주>에서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그저 한 여자아이의 불안한 눈빛과 어정쩡한 몸부림이다. 충분히 해석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 진짜 고통은 그렇게 묘사된다.

그렇게, <한공주>는 관객들이 지니고 있는 윤리적 기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충분히 가시적이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대개 침묵을 지킨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껏 내뿜었던 분노가 수동적 결과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준다. 범죄로부터 출발하는 영화들은 마치 우리 사회에는 희망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는 듯이 말한다. 아니 우리 사회는 희망을 아예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희망보다는 절망이, 이해보다는 분노가 더 매력적인 상품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절망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미래와 희망을 보기 위해 잔혹한 장면을 목격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가 꿈꿀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은 없다. 애초에 그런 것이야말로 커다란 거짓이자 환상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여전히 개인에게는 발견해야 할 희망의 몫이 있다. <한공주>에 재현된 현실이 절망적이지만 그 안에서 잠영 중인 희망의 그림자를 발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래는 그렇게, 잔혹한 현실 아래 조용히 엎드려 있을 테니 말이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