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상상적 허구, 상품이 된 노년

노년은 어떤 시기일까? 최근 개봉한 몇 편의 영화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노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그레이트 뷰티> 그리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들이 그렇다. 나이 순으로 따진다면, 아직 교수직을 퇴직하지 않은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가장 젊을 듯싶다. 그 다음은 65세 생일을 맞는 <그레이트 뷰티>의 젭이다.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알란이 최고 연장자이다.

노인이 주인공이라고는 하지만 생각과는 다른 삶이 그려진다.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학교와 집을 오가던 그레고리우스는 난생처음 일탈을 감행한다. 다른 사람이 예매해 둔 표를 들고 수업 중에 돌연 리스본행 열차를 타고 떠났으니 말이다. 책 한 권의 비밀을 찾아 그레고리우스는 처음으로 서지학을 벗어나게 된다. 독재와 혁명의 흔적을 생생한 증언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은 학자로서의 두 번째 삶과 닮아 있다. 진짜 삶이 주는 감동을 통해 고고학과 서지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레이트 뷰티>의 주인공은 좀 더 직관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인생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라고 말이다. 그는 첫사랑에 대한 기억과 그 첫사랑의 부재 근처를 맴돌며 인생의 궁극적 아름다움을 찾는다. 알란의 인생이 가장 드라마틱하다. 1905년 스웨덴 시골에서 태어난 알란은 근대사의 주요한 순간, 중요한 장소에서, 무척 중대한 일들을 해낸다. 프랑코, 스탈린, 김일성을 만나는 알란의 여정은 근대사의 주요 지점들과 정확히 겹친다.

치매 같은 기억 질환이나 퇴행성 질환에 시달리는 노년, 사실 우리가 대중문화 속에서 보아왔던 노년의 이미지는 부정적인 것들이 대개였다. 그런데 최근 개봉하고 있는 영화들은 노년의 부정성, 그 정반대편에 있다. 65세가 된 유명 작가는 여전히 젊은 여성과 섹스를 하고, 친구들과 지적인 대화를 나눈다. 심지어 100세 노인은 어마어마한 돈이 든 가방을 챙겨 들고 방해되는 조직폭력배들까지 처리해 나간다. 우리가 우려하고 두려워하는 노년의 세계와 세 영화가 그려내는 노년은 완전히 다르다.

영화 속 노년대로라면 늙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레고리우스처럼, 하마터면 몰랐을 인생의 참맛을 알게 되는 노년이라면 말이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그레고리우스는 풍문 속 포르투갈의 격동기를 생생한 증언으로 간접 체험한다. <그레이트 뷰티>의 젭처럼 상위 1퍼센트의 경제적 지위와 지적 수준 1퍼센트 안에 드는 친구들이 있는 미래라면, 노년은 기다려지는 미래이다. 어느 날 문득 50억원 정도의 돈을 횡재하는 100세라면, 그건 장기적금만기일보다 더 반가울 테다.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그레이트 뷰티> 그리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한 장면(위 사진 부터).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면 영화 속에 그려진 노년은 현실이라기보다는 상상된 노년에 더 가깝다. 그 노인들은 상상의 공동체 속 인물들이다. 100세를 산 알란은 사건과 이야기로 가득 찬 한 세기를 보낸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는 창문을 넘을 만큼 건강한 무릎을 100세가 되도록 유지하고 있다. 정신의 온전함은 말할 것도 없다. 65세가 된 젭에게도 건강이나 경제적 문제는 없다. 교수인 그레고리우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차표를 발견하고 불현듯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적어도 그가 매일 복용해야 하는 약을 끼고 살지 않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 가서도 당황하지 않을 지력과 체력이 있기 때문이다.

상상된 노년의 실체는 이야기의 주체인 원작자나 감독의 나이에서 더 분명해진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쓴 원작자 요나스 요나슨은 마흔 일곱 살이 되던 해 동명의 소설을 써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영화화한 감독 펠릭스 헤르그렌은 작가와 비슷한 1967년생이다. <그레이트 뷰티>의 감독 파올로 소렌티노는 1970년생이다. 영화 속 주인공보다 스무 살이 어린 그는 45세의 나이에서 65세를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편안한 위치에서 다만 정신적 공허와 결핍을 호소한다. 복지로 이름난 스위스, 스웨덴 출신의 작가, 이탈리아 출신의 감독이라는 점도 우연만은 아닐 듯싶다.

작가와 감독의 생물학적 나이가 상상적 허구로서의 노년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다만 상상적 허구로 그려낸 그 노년이 지나치게 투명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알랭 바디우가 <사랑예찬>에서 인용했던 말을 은유적으로 차용해보자면 “괴로움 없이 늙기, 참 쉬워요”쯤 돼 보인다. 투명한 노년엔 질병도, 가난도, 외로움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일탈과 쾌락, 삶의 진정함만을 문제 삼는다. 영화 속에서 노년은 투명하고 완만하게 묘사된다. 그들의 노년엔 형이상학적 괴로움만 있다. 여유가 선사하는, 모두가 바라는 우아한 노년일 테다.

즐거움이 결락된 채 고통만 남은 노년도 일면적이다. 하지만 이질적인 요소를 모두 빼버린 노년도 인공적이긴 마찬가지이다. 사실 노년이야말로 허락하고 싶지 않던 부정성과 함께해야만 하는 시기이다. 뒤늦게 범칙금 통지서를 받듯 젊음을 빌미로 버려둔 생의 이면들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도 노년기이다. 감춰 두었던 근원적 균열과 두려움 즉, 우리는 언젠가 죽게 되리라는 것, 변형되고 소멸되리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는 시기, 그때가 바로 노년기이니 말이다. 부정성을 없앤 투명하고 밝은 노년기는 매력적인 상품이다. 하지만 상상적 허구는 달콤한 환상에 불과하다. 부정성과 투명성이 함께하는 노년, 두렵지만 우리는 두 가지 모두를 보아야 한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