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1000만 흥행의 그림자

흥행은 사회적 사건이다. 어떤 작품들은 한 번의 리뷰로 부족할 때가 있다. 대개 첫 번째 글은 영화 자체를 분석하고, 두 번째 글은 흥행 요인에 대한 분석일 때가 많다. 세 번째 글은, 영화 그리고 흥행을 소비하는 사회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다. 작품이 흥행을 하고, 그 흥행 자체가 뉴스가 되면, 그 범람하는 뉴스는 곧 사회의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명량>은 ‘졸작’이라는 식의 일차적 20자평은 이미 진작 했어야 옳다. 영화 내부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사회적 맥락 속에 이미 <명량>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2014년 8월10일 기준, 영화 <명량>이 1000만 관객을 넘어섰다. 포털사이트는 온통 <명량>의 1000만 관객 돌파로 북적인다. 기사에 동원된 문구를 보면 이렇다. “신기록” “최단” “최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이런 기사 제목이다. “눈엣가시 <아바타>에 뺏긴 5년, 되찾을 때 됐다.”(뉴스엔)

이 제목들 속에는 우리가 영화 <명량>을 소비하는 방식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우선, 숫자로 환원된 대중 예술의 성적표이다. 영화는 물론 대중 예술이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듯이 영화의 노에마는 대중 예술성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중 예술이라는 말과 대중 지향적 예술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숫자에 매달리는 평가는 시장이라는 경주 트랙 위에 올려진 경주마를 연상케 한다. 흥행만 잘되면 만사형통, 수익이 영화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애국심이다. <명량>의 소재가 외침인 데다 실존인물인 이순신의 전투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짐작되었던 바이지만 <아바타>에 대한 일차적 비유는 그 애국심의 선정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인터넷에 공공연히 퍼져 있는 “갓순신”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소비 방식은 중국 후한의 명장 ‘관우’가 무속(巫俗)신앙의 장군님이 된 것과 꼭 닮아 있다.

<명량>의 흥행에는 몇 가지 사회적 맥락이 있다. 공고한 리더십에 대한 갈망이나 리더의 감정 노동에 대한 공감이 흥행에 큰 힘을 보탰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영화 <명량>의 외부에 놓여 있는 최근 1000만 영화의 흐름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 <변호인> <명량>에 이르기까지 최근 1000만 관객 동원 영화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모두 실재했던 실존인물이었던 셈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관객 그러니까 대중이 허구가 아닌 실제에 환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명량’에 관객이 많이 든 이유는 뭘까
애국심·리더의 모습 등을 들겠지만
이순신의 고뇌를 통해 보고 싶은 건
현실에 결핍된 그 무엇일 것이다”


허구를 통해 삶을 재구성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와 훈련이 필요하다. 역사와 실존인물을 소재로 할 때 허구는 완충재 역할을 한다. 메시지는 훨씬 더 분명해지고, 이미지 역시 강렬해진다. 역사를 대문자 기록이라고 말한다면 허구는 상상과 소문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에 매혹된다는 것은 대중이 개연성보다는 메시지에 집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 그러니까 히-스토리 안에서 현재적 삶의 이미지를 찾는 것이다.

허구가 가미된 역사로서 1000만 영화들은 현실의 힘을 반영하면서도 일상 언어로 현실을 표현한다. 가령, 신하된 자의 충이 임금이 아닌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것은 정유재란 당시 조선의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지금, 현재, 우리의 이상에 더 가깝다. 이런 맥락 가운데서, 당시 이순신은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희생자가 되어 고초를 당했지만 또 한편 통시적이며 현재적 인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결국, 관객들이 역사 속에서 찾는 것은 지금 현재, 우리의 삶에 투영될 어떤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가장 만들기 어려운 장르 중 하나가 판타지이다. 제작비 차원의 문제라고만 생각되지만 실상 판타지라는 대안 세계가 동화 즉 어린이들의 공상과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나니아 연대기>나 <반지의 제왕>과 같은 판타지를 진지한 사유의 대상으로 삼기를 꺼리는 것이다. 비록 이 두 판타지가 1, 2차 세계대전 당시 만들어진 대안 세계였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이처럼 세계를 허구로 경유할 만한 여유가 없다. 판타지라는 것은 잘못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회피 내지는 유예처럼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결국, 사실과 실화가 가장 매력적 이야기 소재라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던 맹골수도와 명량대첩의 울돌목이 그리 멀지 않듯, 영화 속 역사는 무척이나 가깝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이야기는 결국 정치적으로 어떤 이론이 수용 가능한지를 검증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현실과 말, 사유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면 현실과 사유 그리고 영화적 재현 역시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역사와 실화 그리고 실존인물 가운데서 변화하는 현실의 그림자를 본다.

역설적으로 말해, 영화는 현실과 우리의 관계를 보여준다. 마치, 억압된 것들이 말실수로 귀환하듯이 흥행의 결과는 그 억압된 것들이 어떻게 증상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순신의 고뇌와 감정 노동, 굴욕과 치욕을 통해 우리가 보고 싶은 것,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현실에 지독하게 결핍된 무엇,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치욕스럽고 굴욕스럽게 만들었던 그 무엇일 것이다. 현실이 아닌 기록과 역사에서 대안과 미래를 찾아야 하는 것, 1000만 흥행의 그림자에는 답답한 우리의 현재가 있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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