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관심병과 악의 진부함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은 악의 “진부함”이라고 번역하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다. 아렌트는 믿기 힘든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의외로 스스로를 이상주의자로 여긴다고 말한다. 삶에서 이상을 실천하는 사람,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 필요하다면 자신의 부모도 죽음으로 보냈을 사람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악행에 도덕을 초월하는 이상을 부여한 채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악행에는 늘 상투적이거나 관용적인 표현이 동원된다는 것이다. 영화 <액트 오브 킬링>에 등장하는 ‘반공’도 그 상투어이다. <액트 오브 킬링>은 1965년과 66년 사이, 1년 동안 100만명의 사람을 희생시킨 인도네시아 군부의 민간 학살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문제적인 것은 영화가 카메라 앞으로 불러들인 서술자들이다. 상투적인 기대감을 꺾고 그들은 상처와 고통을 서술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그 일들을 주도했던 가해자들, 안와르 콩고와 정치 갱스터들을 카메라 앞에 불러들였다. 가해자들에게 학살의 재연을 요구한 것이다.

<액트 오브 킬링>의 놀라움은 우리가 인간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의 마지노선을 흔든다는 데서 비롯된다. 우리는 적어도 모든 인간에게 수치심이나 죄의식이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아니, 믿고 싶어한다. 악행을 저지른다고 해도, 그 악행을 반성할 수 있는 기본적 자질이 인간에게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액트 오브 킬링> 속 학살의 주범들은 스스로의 범행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랑스럽게 떠벌린다. 과거 학살을 영화로 촬영한다고 제안하니 마치 대단한 기록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신이 났다.

그들이 카메라 앞에서 취하는 행동은 바로 승리한 자의 모습이다. 마당에 고인 피를 처리하기가 귀찮아서 철사로 교묘히 죽이는 방법을 고안했다고 말하는 안와르 콩고의 모습은 대단한 비책을 전수하는 고수처럼 당당하다.

주목을 끄는 것은 그들이 캐스팅하고자 하는 수많은 피해자 역들이다.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마을에 도착해, 과거 학살을 재연하는 영화를 찍으니 엑스트라나 공산주의자 배역으로 자원하라며 사람들을 모집한다. 하지만 아무도 쉽사리 손을 들고 배역을 맡지 못한다. 가해자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에겐 그들의 입에서 호명되는 공산주의자라는 이름이 쉽사리 자원할 수 있는 ‘배역’이 아니라 상처이자 공포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들에게 대학살은 상투적인 승리의 현장이다. 하지만 그들 외의 사람들에게는 기승전결이 분명한 이야기이자 상처이며, 현실이다. 가해자들에겐 과거이지만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현재적 이야기이다. 상처가 현재 진행형인 사람들에게 재연은 공포스러운 제안이자 자신을 건 도약이 될 수밖에 없다. 피해자에게는 서사가 있지만 가해자에게는 서사가 있을 수 없다.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의 한 장면


▲ “인도네시아 군부의 대학살극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액트 오브 킬링’
가해자역 재연한 학살의 주역들은
‘인간’이기보다 ‘주인공’이길 원했다”


영화가 가진 힘 중 하나는 바로 자기반영성이다. 아이가 태어나 처음 거울을 보며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듯이 영화는 상투화된 삶의 거울이 되어 준다. <액트 오브 킬링>은 영화의 자기반영성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다큐멘터리는 있는 사실을 고스란히 전달한다는 사실 재현의 가치에서 출발한다. 대학살의 주역들이 대학살을 재연함으로써 다큐멘터리와 픽션 사이의 경계는 아프게 요동친다.

이 흔들림 가운데서 대학살의 주역이라는 상투적 비유어는 대학살의 원흉이 주인공이 되는 역설적 사태를 재현해 낸다. 그는 수사학 가운데서 대학살의 주역일 뿐만 아니라 대학살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윤리적 판단 속에서 대가를 치러야 마땅한 주범이 학살을 연출하고, 재연하고, 스스로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이 된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우리, 관객은 분노를 넘어선 무력감, 무력감을 넘어선 절망감을 느낀다.

가해자 안와르 콩고는 피해자 역을 직접 해보고 나서는 공포를 느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고문했던 사람들도 공포를 느꼈겠죠, 라고 반문한다. 그때 카메라 뒤에 있던 목소리가 대답해 준다. “당신은 이게 영화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곧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았겠죠.” 이 말을 듣고 안와르 콩고는 잠시 심란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마치, 피해자의 심정을 이해라도 했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해가 아니다. 일주일간의 군대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돌이 화생방 훈련을 마치고 진짜 군 생활을 말하는 것처럼 안와르의 심란함도 일회적 감상에 불과하다. 공포는 한 번의 재연으로 이해하거나 깨달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인간의 내면이나 상처란 그렇게 간단하지도 단순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처럼 단순하게 반성이 이뤄질 수 있다면, 악은 그처럼 진부하게도 평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 심란함조차 진부함의 일부일지도 모르겠다.

가해자가 심란함이나 반성을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우리는 여러 차례 역사 속에서 보아왔다. 가해자는 무대에 서는 것을 좋아한다. 무대라면 반성의 연기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이 대학살의 주범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삶을 주역과 조연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 탓이 크다. 각각 하나하나의 삶이 다 소중하고 그들이 그 삶의 주연이라고 여겼다면 그렇게 함부로 타인의 목숨을 빼앗고, 그 삶의 기반을 파괴할 수 있었을까? 무대에 설 수만 있다면, 주연이 되기만 한다면 나머지 모든 가치를 버릴 수 있는 자들, 악은 유아적 관심병의 고착에서 비롯된 진부함일지도 모르겠다. 가해자들의 기록으로 이뤄진 역사는 영원한 관심병 환자들이 주인공이 되는 진부한 역할극과 다르지 않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배우의 눈빛  (0) 2014.12.21
두 아버지  (0) 2014.12.07
사랑의 발명  (0) 2014.11.09
자연주의 재고  (0) 2014.10.26
수사학이 불가능한 시대  (0) 2014.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