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두 아버지

성석제의 소설 <투명인간>은 베이비부머 세대로 태어난 김만수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세상을 등지고 두메산골 농부로서의 삶을 선택한 아버지,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뛰어난 형 덕분에 만수는 어린 시절부터 꼴머슴 차남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공부만 하던 형이 큰돈을 벌겠다며 나선 베트남전에서 주검으로 돌아오자 차남 만수는 실질적 가장이 된다. 서울 변두리로 이사와 성실함 하나만으로 고군분투하며 자리를 잡지만 50줄을 넘어선 가장을 세상은 가만두지 않는다. 마포대교 위에서 그는 마침내 ‘투명인간’이 되고 만다.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는 얼핏 보면 만수와 비슷해 보인다. 농담이지만, 이름조차 한 글자 차이 아닌가? 베이비부머 세대의 표본으로 만수가 선택되었다면, 유년기에 한국 전쟁을 겪었던, 이전 출생자들의 표본이 바로 ‘덕수’다. 1950년 흥남철수 때 여동생을 잡고, 끌고, 업고 피란선에 올랐던 인물이니 아마 대략 1930년대 말이나 40년대 초반 생일 확률이 높다.

소설 <투명인간>이나 영화 <국제시장>이나 대한민국의 격동기, 1960~80년대를 몸뚱이 하나로 살아내야 했던 이 시대 아버지 이야기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투명인간>의 만수가 차남이었던 것에 비해 <국제시장>의 덕수가 장남이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소설가 이기호의 말처럼 차남의 역사와 장남의 역사는 무릇 다르게 기억되고, 기록되기 때문이다.

장남 덕수와 그의 가족들은 피란선을 타고 내려와 부산 국제시장에서 터를 잡고 있던 고모의 가게 ‘꽃분이네’에 거처를 마련한다. 잃어버린 여동생이나 소식이 불분명한 아버지보다 더 급한 것은 남아 있는 자식들의 생계이다. 어머니는 큰아들 덕수를 불러 앉혀 놓고, 네가 이 집안의 장남이며 가장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그래서 장남 덕수는 지금이라면 초등학생에 불과한 10대 시절부터 이런저런 일들로 생계를 보탠다. 슈샤인보이로 구두를 닦고, 뭇매를 견디며 사수한 초콜릿을 동생들의 입에 넣어 준다.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만수가 서울 근교로 이사 온 뒤 삭막한 인심에 시달리는 것과 달리 부산에 피란 온 덕수는 좋은 친구를 만나 텃세도 면한다. 텃세보다는 인심과 온정이 피란민의 어린 가장을 돌본다.

이후 덕수의 삶은 70, 80년대 한국 현대사의 중요 장면을 경유한다. 60년대 1차 파독된 광부들 사이에 끼어 광산에 가고, 70년대 베트남전에서 상사 직원으로 근무한다. 그리고 80년대, 월남한 피란민으로서 이산가족 찾기의 주인공으로 헤어진 가족을 찾아 나선다. 덕수를 움직이는 삶의 동력은 ‘장남’이라는 호명의 무게와 ‘생계’라는 경제적 압박이다. 그는 어린 가장으로서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학업을 포기한 채 독일에 가고, 자신의 꿈을 버리고 베트남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목숨 걸고 벌어 온 돈으로 차남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막내 여동생은 결혼을 한다.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 소설 ‘투명인간’ 영화 ‘국제시장’
만수와 덕수란 이름의 아버지
격동기 ‘희생적 삶’ 꼭 닮았지만
마지막 ‘뒷모습’은 너무 다르다


덕수가 살아온 60여년간의 삶은 고도성장기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폐허에서 시작한 전쟁기 소년가장이 희생과 도전을 거듭해 결국 한 가정을 지켜 낸 이야기가 바로 <국제시장>인 셈이다. 1950년 흥남철수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2014년 현재 부산 남포동 국제시장에서 끝난다. 두 시간 여의 러닝타임이 짧은 것은 아니지만 64년의 시간을 담기에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흥남철수, 독일, 베트남, 이산가족 찾기라는 큰 네 가지 서사적 매듭 위에서 그 사이의 다른 이야기들은 모두 괄호에 넣어진다. 가난한 피란 가족의 장남으로서 ‘가계’를 세워 나가는 경제이야기가 전경화될 뿐 이면에 감춰진 다른 이야기들은 다룰 겨를이 없다. 아니, 다루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국제시장>에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 세대의 희생’이며 그 희생을 딛고 일어선 현재,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경제적 윤택함이다.

영화 속에서 아버지 덕수는 ‘이 고생을 우리 자식이 아닌 우리가 겪는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이고’라고 말한다. 66년 덕수가 계약기간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 온 후 곧 아버지가 되었으니 그 자식 세대는 우리가 ‘386’세대라고 부르는 67년생쯤 될 것이다. 결국, 67년 이후 태어난 우리는 폐허 위에서 목숨을 걸고 돈을 벌어 부의 기반을 창출해 준 ‘아버지’에게 따뜻한 감사와 뜨거운 눈물로 보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영화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소설 <투명인간>에서 주인공 만수는 경영난에 처한 회사의 경영권 보호를 위해 싸우다 어마어마한 손해배상금을 물게 된다. 하루 스무 시간의 아르바이트를 전전해도 20% 복리 이자를 당해 낼 수는 없다. 아내의 투병, 자살을 선택한 조카. 50이 넘은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고생을 했으면 뭔가를 남겨야 할 텐데, 종일 소꼴을 먹였던 60년대 개운리 만수의 삶보다 나아진 거라고는 하나도 없다. 아니, 더 나빠졌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만수는 ‘자살대교’라는 오명을 가진 마포대교 위에 서 있다.

하지만, 국제시장에서 일생을 보낸 덕수의 끝은 다르다.

그에게는 이를테면, 노후가 있다. ‘알박이’라고 비난받는 가게 ‘꽃분이네’도, 치매도, 암도 걸리지 않고 건강한 아내도, 그리고 자기 명의로 된 집도 있다. 무엇보다, 집안 가득 사람 온기를 채워주는 자식, 손자들이 가득하다. 덕수도, 만수도 모두 ‘우리의 아버지’라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그 아버지들의 뒷모습은 너무도 다르다. ‘아버지’가 다른 건지 ‘우리’가 다른 건지, 생각해볼 문제이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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