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영화의 블랙홀

독일 탄광에서 생사를 넘나든 남편이 다시 베트남 전장에 가겠노라고 통고한다. 고모가 물려준 가게를 자신이 인수하고, 막내 여동생을 시집보내기 위해서이다. 이제는 남편이자 아들, 딸의 아버지이기도 하기에, 이번만은 아내가 참지 않는다. 이젠 당신의 삶을 살아도 되지 않느냐고, 이젠 그런 희생을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냐고 소리친다. 그때, 남편이 대답한다. “이게 내 팔자란 말이다. 팔자.”

때마침,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개인사의 중요한 문제로 눈물 흘리고, 소리치던 부부가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느끼며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 애국가를 따라 부른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을 갖다 붙였다. 영화를 본 게 아니라 자신의 이념을 세워 두고 그것에 무조건적으로 이어 붙이는 격이다.

그런데 서사적으로 중요한 부분들은 때로 지나치게 사소하게 다뤄지곤 한다. 이건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이 가지고 있는 교묘한 작용 중 하나인데 오히려 중요한 고백은 행간으로 사라지고, 중요하지 않은 행동이나 농담이 더 부각되는 방식이다.

사라진 행간을 복구하자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팔자”라는 말, 그 단어 자체이다. 덕수가 베트남에 가려고 할 때 영자는 무척 논리 정연하게 덕수를 반격한다. 덕수가 내세우는 건 바로 가족의 윤리이다. 고모의 가게를 물려받는 것, 여동생을 시집보내는 것 모두 가장 덕수의 가족 윤리이다. 그때 영자는 다른 가족의 윤리를 내세운다. 이제 당신은 아버지가 물려준 가족의 가장일 뿐만 아니라 당신이 선택한 가족, 새롭게 구성된 이 가족의 가장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덕수가 가진 가족 윤리는 영자의 가족 윤리 앞에 허술해지고 만다. 그건 윤리가 아니라 강박일 수 있음을 정면으로 지적한 것이다.

논리적 모순에 처한 덕수가 택한 최후의 반론이 바로 “팔자”이다. 팔자,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운명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운명이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서사 양식의 핵심이기도 하다. 바로 그리스 비극 말이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은 모두 하나같이 운명적 결함(hamartia)을 지녔다. 가령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게 될 것이라는 신탁에서 단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 스핑크스의 퀴즈를 모두 풀 만큼 지혜로운 인간이었지만 그는 신의 설계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부부가 언쟁을 벌이다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함께 애국가를 따라 부르고 있다.


▲ “작품 완성도·짜임새를 말하는 게
영화 평론의 본질이라면
‘토’와 ‘좌빨’은 비평이 아니라
그건 이미 영화 밖의 선동이다”


그리스 비극 안에서 운명은 거스를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덫이다. 운명, 여기에는 저항이나 질문보다 순종과 순응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주술이 담겨 있다. 운명의 반대편에는 선택이 있다. 운명이 자발적 선택의 불가능성을 말한다면, 선택은 주체의 의지를 보여준다. 아무것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순종이 운명의 근거라면 선택의 가능성은 주체의 폭을 넓혀 준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변혁의 가능성이다. 그래서 점점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하며 우리는 운명을 선택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왔다. 사회적 불평등이나 불합리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던 시대는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변화를 맞았다.

팔자나 운명이라는 말 앞에서는 모든 논리가 봉쇄된다. 이 추운 겨울에 난방비를 댈 수 없어 자살을 선택한 모녀의 죽음도 팔자가 되고, 계모의 폭력에 시달리다 여린 갈비뼈가 부러진 소녀의 죽음도 운명이 된다. 팔자나 운명은 인간이 지혜를 모아 제도적인 개선을 이룰 수 없다는 포기의 선언이다. 영화 <국제시장>이 말하는 팔자가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팔자라는 말에는 논리가 없다.

영화적으로 말하자면, <국제시장>의 덕수가 겪는 삶의 질곡들은 무척 개연성이 떨어진다. 흥남 철수에서 아버지를 잃고, 독일 광산에서 죽을 뻔하고, 베트남 전쟁에서 또 한번 죽을 위기를 넘긴 인물이 이산가족 찾기에서 잃어버린 여동생을 만난다. 게다가 덕수는 우연히 정주영 회장을 만나고 남진과 조우한다. 유명인과의 만남은 개연성을 무시한 코미디적 요소로 받아들이자. 그런데 한 인물의 질곡을 다룬 드라마에서 덕수의 삶은 우연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강박적이다. 이 돌발적 우연성은 <국제시장>에서 팔자라는 대의명분 속에서 희석된다. 무엇보다 <국제시장>은 우선 영화적 만듦새가 헐겁다.

하지만 이 헐거운 만듦새가 흥행에 꼭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는 <7번방의 선물>에서 부족한 개연성이 흥행과 무관하다는 것을 경험한 바 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영화적 만듦새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미 육백만, 칠백만의 관객이 영화를 선택했다면 그건 분명 사회적 사건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무릇 평론이란 작품 자체의 완성도와 짜임새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미 고인이 된 로저 이버트는 엄지손가락을 올리고, 내리는 극단적 평가 방식으로 여러 논란을 불러 왔다. <트랜스포머>에 별점 0점을 주고 손가락을 내린 게 대표적인 예시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영화 안에서 먼저 평가를 내렸다. 영화의 윤리적 올바름이나 정치적 올바름도 밖이 아니라 안에서 충분히 규명 가능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평론이 아니라 선동을 인용한다. “토”나 “좌빨”은 비평의 용어가 될 수 없다. 그건 이미 영화 밖의 선동이다.

<국제시장>의 논쟁은 영화 안이 아니라 밖의 원심력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는 블랙홀의 강한 구심력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위험이 묘사된다. 어쩌면 우리는 각자 다른 계산이 영화 주변의 구심력이 되는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좋은 영화는 이미 작품 안에서도 훌륭하며 3류 영화는 구조적으로 그 부족함을 증명할 수 있다. 김현, 정성일과 같은 비평가들이 어떤 자기 검열을 거쳐 평가를 문자화했는지 다시 한번 새겨볼 일이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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