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실화와 허구 사이

▲ 실화 소재 ‘강남 1970’ ‘쎄시봉’
실존인물·공간 고스란히 쓰면서
‘영화 속 사건은 허구’ 애써 강조
예술의 고유영역… ‘변명’ 왜 했나


새해 들어 기대되는 두 작품이 있다. 한 편은 이미 개봉해 대중에게 선보인 유하 감독의 <강남 1970>이고 다른 한 편은 김현석 감독의 <쎄시봉>이다. 두 영화는 공교롭게도 모두 과거로 영화적 시간대를 옮겼다. 게다가 모두 실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니, 실화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단어이다. ‘실재(實在)’를 소재로 삼고 있다.

<강남 1970>은 제3한강교, 경부고속도로와 함께 본격화된 강남 땅값 열풍을 다루고 있다. <쎄시봉>은 제목 그대로 1960년대 명동을 휘어잡던 대중음악 감상실 ‘쎄시봉’을 소재로 삼고 있다. 두 이야기 모두 약 40년 내지 50년 정도 멀리 떨어져 있는 서울에 실재했던 어떤 ‘일’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두 영화 모두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본 영화에 거론되는 사건은 허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재했던 공간과 심지어 실존 인물의 이름을 고스란히 쓰면서도, 전부 다 사실은 아니고 꾸민 부분이 있다고 급급히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 따져보자. 영동이라는 강남의 별명이 영등포 동쪽이기 때문인 것도 맞고, 땅 투기꾼들이 압구정 원주민들을 속여 큰돈을 번 것도 사실이다. 아니면 이런 장면도 있다. 최고 권력자의 왼팔이나 오른팔 정도 되어 보이는 인물이 강남 개발과 땅 투기를 의도했다. 국회의원도 참여했고, 깡패들도 동원되었다. 정치인이 불러들인 깡패이니 그들은 ‘정치깡패’라는 칭호가 어울릴 듯하다. 아마도 이 부분에서 거론되는 인물들이 바로 ‘허구’라는 설명의 주인공일 것이다. 누구일지 충분히 짐작되는 행동과 말투를 보여주고 있지만 누구라고 이야기해서는 안되는 인물 말이다.

<쎄시봉>의 경우는 좀 더 민감하다. 왜냐하면 영화 <쎄시봉>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존 인물을 거의 그대로 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영남’만 해도 그렇다. 김인권이 연기하는 조영남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조영남이다. 윤형주, 송창식, 이장희도 마찬가지이다. 학력도, 부른 노래도, 쎄시봉이 없어진 이후 살아온 삶도 대개 사실에 가깝다.

애매해지는 부분은 바로 여기다. 음악감상실 ‘쎄시봉’이 배출한 스타 ‘트윈 폴리오’가 사실은 ‘트리오 쎄시봉’, 즉 세 명으로 구성된 팀이었다는 설정 말이다. 트리오를 구성하는 제3의 인물은 ‘오근태’로 구체화된다. 영화의 주된 뼈대는 유일한 가상 인물인 ‘오근태’(정우, 김윤석)와 그가 사랑했던 여자 ‘민자영’(한효주, 김희애)의 사랑 이야기이다. 오근태가 허구적 인물이라는 것은 그가 사랑한 여자 민자영 그리고 그들의 사랑 이야기도 모두 허구라는 것을 의미한다.

김현석 감독의 영화 <쎄시봉>


문제는 트윈 폴리오가 실제 트리오로 데뷔할 뻔했다는 점이다. 음악다방에서 트리오로 활동했던 이익균씨는 군입대 때문에 데뷔를 포기한다. 영화 속 오근태도 쎄시봉을 떠나 군대에 간다. 말하자면 오근태는 이익균이라는 실존 인물을 변형한 인물이다. 즉,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낸 가상이 아니라 실제를 참고해 만들어낸 수정본인 셈이다. 게다가 이 허구의 인물은 <쎄시봉>의 불명예 중 하나인 대마초 사건의 핵심 인물로 묘사된다.

주목할 것은 대마초 사건의 근간에 바로 사랑이 있었다는 해석이다. 김현석이 재구성하고 싶었던 것은 1960년대풍의 아날로그적 사랑 이야기이지 진짜 1960년대는 아니었던 것이다. 대마초 사건과 탄압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낭만적 사랑의 장애물일 뿐이다. 통금이나 미니스커트 단속과 같은 당대의 억압적 환경은 오히려 사랑을 배가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반면, 유하 감독은 <강남 1970>을 통해 우리에게 가려져 있는 1970년대를 복기하고자 노력한다. 주인공은 우연히 정치깡패가 되지만 감독의 계산 속에서 그것은 필연이다. 1970년대 서울 강남을 이야기하는 데 정치와 권력을 빼놓을 수 없는 원동력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를 노리면서 실재성을 부정하다 보니 칼날의 끝이 무뎌지고 만다. 말 그대로 ‘지록위마’의 아이러니가 영화에도 적용되는 형편이다.

올해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주요 작품들 중 많은 수가 공교롭게도 모두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네이비실 저격수의 삶을 그린 <아메리칸 스나이퍼>, 자신이 고용한 레슬링 코치를 총살한 억만장자를 다룬 <폭스 캐처> 등은 모두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을 다루고 있다. 9·11 테러 이후 중동 지역에 파병되었던 저격수나 실형을 언도받은 후 이미 세상까지 떠난 억만장자 살인범은 모두 다루기 쉬운 실화는 아니다. 두 영화 모두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 대해 의견을 피력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 매우 건조하게 사실을 보고하면서 영화를 맺는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허구라든지 어떤 부분은 허구라는 사실을 굳이 강조하지 않는다. 실재 사건을 허구로 만드는 것, 그것은 예술의 고유한 영역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역시 실제로 일어났던 기차역 투신 사건에서 시작된 것 아닌가.

감독은 뉴스가 생략한 어떤 부분을 최선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하면 된다. 변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아무리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창작자의 손에 맡겨진 이상 그것은 그의 창조적 재해석이며 재구성된 허구이다. 정말 이야기되어야 할 부분은 그 창조적 해석과 사유가 들을 만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이다. 어디까지 사실이고 또 어디까지 사실이 아닌가를 밝혀 명예니 훼손이니 책임을 물을 문제가 아니다. 검열은 사라졌다지만 아직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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