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나의 템포에 따르라

▲ ‘폭스캐처’ ‘위플래쉬’의 지도자들은
우리 사회의 ‘갑’과 꼭 닮아 있다
땅콩회항·열정페이·미생 인턴…
그들 변덕에 맞춰 계속 춤출 것인가


이야기의 역사에서 아버지와 자식의 대결은 무척 중요한 주제이다. 부패한 아버지, 무능한 아버지, 타락한 아버지와 자식의 대결, 그건 세대 갈등 혹은 세대 충돌과 닮아 있기도 하다. 많은 어머니 서사들이 ‘모성’이라는 환상을 풀어내는 것과 비교해보면 더 흥미롭다.

프로이트가 고안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서사는 부자 대결 서사의 가장 대표작이자 흥행작이기도 하다.

미국 영화사에서도 ‘아버지’는 무척 논쟁적인 소재이다. 1970년대 <오멘>이나 <엑소시스트> 같은 공포영화들의 등장은 영화계를 놀라게 했다. 귀여운 아이들이 악마에 씌여 어른들을 공포로 몰고 갔으니 말이다. 영화계의 분석은 젊은 세대의 등장에 대한 기성세대의 공포로 귀결되었다. 미국 영화사에서 아버지는 의식보다는 무의식 차원의 서사에 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셈이다.

2015년 아카데미 영화상 후보작에 오른 두 작품 <폭스캐처>와 <위플래쉬>의 중심 서사도 바로 아버지다. 그런데 이 두 작품은 그 ‘아버지’를 무척 대조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흥미롭다. 우선 영화를 만든 두 감독의 나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교적 젊은 감독이기는 하지만 <폭스캐처>의 감독 베넷 밀러는 1966년생이다. <머니볼>이나 <카포티> 같은 전작으로 이미 비평적 성과를 얻기도 했다. 반면 <위플래쉬>의 감독 데미언 차젤은 1985년생이다. <위플래쉬>는 데미언 차젤의 장편 데뷔작이다. 말 그대로, 슈퍼 루키다.

<폭스캐처>는 레슬링 국가대표였던 마크, 데이브 슐츠 형제와 그들을 후원하던 존 듀폰의 이야기다. 존 듀폰은 금메달리스트 마크 슐츠의 물질적, 정신적 멘토가 되어 다가올 1988년 서울 올림픽의 후광이 되고자 했다. 이야기는 존 듀폰이 마크 슐츠의 형 데이브 슐츠를 총으로 쏴 죽이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아카데미 영화상 주연상 후보에 오른 사람은 피해자인 마크가 아니라 가해자인 존 듀폰이다. 즉 영화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으나 살인자가 된 존 듀폰의 무의식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영화는 살해 동기를 심리학적으로 접근해 간다. 거기에는 인증에 대한 강박에 시달렸던 상속자의 미성숙과 불안이 놓여 있다.

반면 <위플래쉬>의 주인공은 최고의 드러머가 되길 꿈꾸는 스무 살 앤드류이다. 그가 다니는 음악학교에는 ‘플래처’가 이끄는 전설적인 재즈팀이 있다. 학생들은 누구나 그의 눈에 띄길 바란다. 하지만 플래처는 명성만큼이나 악명도 높다. 그의 악명은 ‘나의 템포’라는 대사로 압축된다. 연주를 지휘하던 그는 누군가를 지목하며, ‘나의 템포’와 맞지 않는다고 슬그머니 지적한다. 내 템포보다 늦다, 빠르다를 반복하며 결국 지목당한 사람을 패닉에 빠뜨리고, 바보, 멍청이, 저능아와 같은 비난 한가운데 파묻는다. 그는 지휘자고, 팀의 리더이자 선생님이기 때문에 단원들은 어떻게든 그 ‘템포’를 찾아 따라가야만 한다. 답은 그만 알고 있다. 결론도 그만 알고 있다.

영화 <위플래쉬>의 한 장면


<위플래쉬>에 그려진 플래처의 모습은 바로 존 듀폰이 꿈꾼 아버지, 지도자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어떤 제한적 세계 안에서 절대적 힘을 가진 자로 군림한다. 존 듀폰이 돈으로 그 군림을 사고자 했다면 플래처는 명성으로 억압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진 그것이 그 세계에 진입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겐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물질적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레슬링 선수들은 존 듀폰의 기이한 성격을 참고, 뉴욕 최고의 재즈 아티스트로 성공하고 싶기 때문에 젊은 연주자들은 플래처의 폭언과 폭력을 견딘다. 좁은 세계일수록 그들의 명성이나 부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지도자들의 군림은 우리가 말하는 ‘갑’의 횡포와 꼭 닮아 있다. 재즈 아티스트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플래처의 폭언과 폭력은 곧 갑질이다. ‘나의 템포를 맞춰라’, 사실 이것이야말로 갑질의 본질이다. 도대체 ‘당신의 템포’란 무엇인가. 비행기를 멈추게 한 조현아의 속내는 ‘나의 템포’, 곧 내 기분에 맞추지 않았다는 비틀린 분노 아니었던가. 말하자면, 갑이란 ‘나의 템포’를 내세우는 자들이며 을은 그 템포를 찾아 나의 템포는 누르도록 요구받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이 ‘나의 템포’라는 게 무척이나 주관적이라서 객관적 기준이나 훈련으로 접근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존 듀폰의 ‘나의 템포’는 끝끝내 살해로 귀결되고, 플래처의 ‘나의 템포’ 역시 시시때때로 바꿔대니 답은 오리무중이다. 이 ‘나의 템포’는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는 열정페이로, 대기업에서는 비정규직 인턴사원으로, 자기계발서에서는 도전으로 변형된다. 그들만의 템포를 만들어 두고는, 이건 내 템포보다 느리다, 이건 내 템포보다 빠르다며 정신없이 채찍을 휘두르는 것이다.

재즈 연주곡인 ‘위플래쉬’의 원뜻은 채찍질이다. 채찍질처럼 질주하는 영화 <위플래쉬>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젊은 감독이 선택한 마지막 장면이다. 플래처의 채찍질에 이리저리 휘둘리던 앤드류는 마지막에 “내 템포”에 맞추라고 오히려 플래처를 공격한다. 연주를 망치면 앤드류는 가능성을 잃지만 플래처는 지금껏 쌓아둔 명성을 잃는다. 과연 누가 더 많은 것을 잃게 될까. 앤드류는 플래처의 권위 의식을 역이용해 자신의 템포에 따라오도록 만든다. 플래처는 연주를 망치지 않기 위해 앤드류의 템포에 눈치보며 맞춘다.

1985년생의 젊은 감독이 아카데미의 템포에 끼어들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자기 템포 덕분 아닐까. 아버지의 템포를 맞추느라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템포에 아버지의 지휘를 끌고 오는 것, 그것이 비록 영화가 제공한 서사적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결국, 젊은이들은 아버지의 템포를 선점해야만 한다.

그들의 템포를 따라가는 것, 그것은 우리를 영원히 ‘아이’에 묶어 두고 싶은 갑의 소망일지도 모른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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