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허삼관에 매혈기가 빠진 까닭은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는 평등에 대한 소설이다. 작가 스스로 그렇게 밝히고 있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이게 왜 평등에 대한 이야기이지, 약간 의아해진다. 이해의 단서는 작가가 쓴 서문에 있다. 그는 하이네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하이네 역시 죽음만이 유일한 평등임을 알았다”고 말이다.

‘세상에 유일한 평등은 죽음뿐이다’ 라는 위화의 세계관은 상당히 무겁고 냉소적이다. 살아생전 우리는 평등을 맛볼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수록, 위화가 했던 말이 과장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법의 잣대라는 것이 가장 먼저 평등에서 어긋나니 말이다. 결국, 살아생전 나쁜 짓만 한 놈이나 손해만 보고 산 사람이나 다 죽기 마련이라는 사실 말고는 평등한 게 없다. 세상이 불평등할수록 유일한 평등은 죽음뿐인 듯싶다.

그렇다면, 이 무거운 평등의 문제를 다룬 <허삼관 매혈기>는 어떨까? 평등의 문제인 만큼 무겁고, 어둡고, 어려울까? 소설 <허삼관 매혈기>의 가장 큰 장점은 딱, 고만큼, 허삼관이라는 평범한 남자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위화는 허삼관의 입을 빌려 무엇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평범 이하의 남자 허삼관을 보여줄 뿐이다. 그는 가난하고, 못 배웠고,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편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다. 그래서 소설은 가볍고, 우스꽝스럽고, 따뜻하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아내를 건드려 아들을 만들고서도 외면하는 하소용이 사고를 당하자, 그것이 인과응보요 평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내가 결혼 전 남자를 만났으니 그는 지금이라도 임분방이라는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면 평등해진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식의 평등을 믿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허술한 허삼관의 평등론이 세상의 그 어떤 법보다 더 관대하다는 것이다. 허삼관의 관대함은 문화대혁명에서 빛을 발한다.

어느 날 허삼관의 아내가 몸을 파는 기녀였다는 비방의 대자보가 나붙는다. 아내는 정치범, 사상범, 지주들 사이에 끼어 하루 종일 비판을 받는다.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가족들이 비판해야 일이 마무리된다고 말한다. 아들들은 엄마 허옥란을 매음녀라고 비난한다. 그런데, 그때 허삼관이 끼어들어 아들들을 다그친다. 아버지도 임분방과 바람을 피웠으니 평등해진 거고, 아버지도 딱 한 번, 엄마도 딱 한 번이니 너희들은 엄마를 미워해서는 안된다고 말이다.

문화대혁명은 야만적이고 잔인했다. 문화대혁명 근처에도 갈 일 없는 평범한 소시민이었지만 시대의 광풍은 그에게도 몰아친다. 소시민 허삼관에게 문화대혁명은 개인적인 원수를 갚는 비방과 다를 바 없다. 그는 자신만의 평등으로 문제를 해결해 간다. 세상이 평등을 모르쇠 하지만 적어도 허삼관만큼은 자신의 윤리로 평등을 실천한다. 그런 그에게 “매혈”은 내 것을 내가 파는, 평등의 실천 중 하나이다.

영화 <허삼관>


▲ “위화의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시대·배경 지우고 가족영화로
시대의 아픔이 잘려 나갔고, 원작의 평등이란 개념도 증발
예술가는 자신의 말을 하는 것… 다음엔 하정우의 말을 기대”


하정우가 <허삼관 매혈기>를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사실 우려가 앞섰다. <허삼관 매혈기>는 재미있지만 생각보다 깊고, 큰 소설이기 때문이다. 평등이라는 주제도 그렇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감독 하정우는 꽤나 현명하게 각색을 해냈다. <허삼관 매혈기>에서 문화대혁명과 같은 중국의 역사적, 정치적 문제는 모두 제거하고 무시간적, 무공간적 가족 이야기로 축소했으니 말이다.

이 축소된 세계 속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바로 가족이다. 하정우는 피보다 진한 사랑으로 연결된 일종의 대안 가정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들을 위해 자신의 피를 파는 아이러니를 통해 혈연 중심의 가족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 혈연을 대신하는 것이 바로 밥상공동체이다. 같이 밥을 먹는 동거인들, 그들은 그토록 먹고 싶었던 고기 만두와 붕어찜을 먹으며 그렇게 가족으로 남는다.

<허삼관 매혈기>가 한 남자와 그의 가족을 통해 시대의 모순을 보여주는 서사라면, <허삼관>은 시대나 공간을 넘어서는 가족과 부성애에 집중한다. 일견, 이 보편화 전략은 꽤나 성공적인 듯이 보인다. 하지만 시대를 빼버리자 정작 위화가 말하고자 했던 평등은 증발되고 만다. 평등이라는 것은 매우 시대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시대와 공간을 없애버리자 그만 스르르 녹아버리고 만다.

이 차별성은 마지막 장면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영화는 피를 팔아 아들을 구한 허삼관과 그의 가족들이 함께 맛있는 식사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소설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피를 팔려고 갔지만 모욕만 당하고 돌아서는 허삼관으로 끝난다. 피를 팔아 황주를 사먹는 것, 거기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물론 각색된 작품은 원작의 부속품이 아니다. 독립된 다른 작품, 즉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와 하정우의 <허삼관>은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하지만 이 각색의 과정에서 원작의 넓은 품이 상당 부분 잘려 나갔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그 잘려 나간 부분은 예민하지만 관대하게 그려낸 시대의 아픔이다. 시대 이야기가 빠진 가족은 결국 동화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시대적 예민함을 마모하고 보편적 윤리로 메꾸는, 오래된 봉합 방식이다. 가족 이야기로 일단 꿰매진 사회적 상처들이 얼마나 많던가? 가족의 맨 얼굴은 시대 속에서 이야기해야만 구체적인 진실에 가까워진다.

가족은 늘 똑같이 세상의 중심이며 근간이지만 모든 시대의 가족이 다 똑같을 수는 없다. 공기를 마시지 않고 살아갈 수 없듯이 시대의 그늘에서 벗어나 있는 가족은 없다.

위화는 우리 나이로 서른일곱살에 <허삼관 매혈기>를 썼다. 감독 하정우는 서른여덟살에 <허삼관>을 만들었다. 훌륭한 예술가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진 자이다. 다음엔 하정우의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이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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