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청량리시장은 건재하다

청량리시장 골목마다 청과물부터 육류까지 다양한 상품을 다룬다. ⓒ김천 자유기고가

냉면 계절이다. 요즘엔 일반 식당에서 여름 별식으로 주로 콩국수를 팔지만 예전에는 냉면이 많았다. 열무냉면, 육수냉면을 내놓았다. 열무냉면이라야 담근 열무에 계란 반쪽, ‘다시다’를 듬뿍 넣어 만든 달콤한 국물에 손으로 뜯어 넣는 공장 면이 대부분이었다. 육수냉면도 거의 비슷해서, 열무 대신 매운 양념을 듬뿍 얹어먹는다는 점만 달랐다. 가게 앞 평상에 아주머니들이 앉아서 면이 잘 떨어지라고 손으로 비비던 장면이 선명하다.

 

최근에 청량리시장을 갔더니, 비슷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한 그릇에 5000원. 싸다고 냉면이 아니더냐. 소고기 곤 육수가 아니라고 괄시할 것이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장은 가장 싼 것을 공급한다. 아직 힘을 잃지 않은 청량리시장은 그 몫을 충분히 해내고 있었다. 반찬 일고여덟 가지에 찌개까지 주고 6000원 하는 백반집, 보리밥과 간단한 찬을 내고 4000원 받는 집, 짜장면이 고작 3000원인 중국집, 맥주와 소주를 3000원밖에 안 받는 주점.

 

1호선 제기역에 내리면 경동시장부터 쭉 훑으면서 시장 투어를 할 수 있다. 안쪽은 씨줄날줄처럼 골목이 이어진다. 가로 축선은 비교적 넓고 직선이지만, 세로로 난 골목은 뒤죽박죽이라 오히려 걷는 맛, 구경의 재미가 있다. 경동시장을 벗어나면 청과물과 생선, 종합 도소매 시장으로 유명한 청량리시장이 등장한다.

 

옛날엔 나도 청과물과 생선을 사러 새벽에도 가곤 했다. 이전한 가게가 많아서 옛 영화는 사라져버렸다. 몇몇 가게만 명맥을 잇는다. 청량리역 쪽으로 걸어갈수록 흥미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이 일대가 모두 시장이 아니라 주거지대가 시장에 편입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재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오히려 옛 정경이 고스란히 남았다. 동행한 친구가 깜짝 놀랐다. 이 동네에서 살았던 토박이다. 40년 전에 살던 ‘적산가옥’ 같은 낡은 집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월세방과 여인숙이 이렇게 많은 곳도 없을 듯하다.

 

이제는 보기 힘든 보신탕을 파는 집들, 대한민국에서 제일 싼 육류 안주인 닭내장탕집도 보인다. 학교 매점에서 팔던, 소가 거의 없는 납작한 튀김만두를 2대째 튀겨 파는 집도 그대로다. 한때 이 시장의 동쪽 끄트머리는 연탄에 굽는 돼지갈비 골목으로도 유명했다. 이젠 힘을 잃고 몇몇 집이 분전하고 있다. 을지로식이 아닌 값싼 통골뱅이를 파는 선술집도 여전히 영업 중! 시장을 벗어나 속칭 ‘588’이라고 불리던 사창가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서서 과거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일대를 지나 답십리 가는 길을 가로질러 건너면 아직도 미개발된 용두동 지역이 반긴다. 언제라도 재개발될 운명이다. 도시에선 찾아볼 수 없는 쌀가게와 낡은 미장원이 아직도 영업하고 있다. 개발되어 모두 떠나갈 때까지 아마도 문을 열고 있을 것이다. 옛날식 전자제품 대리점에는 선풍기를 진열해 놓고 팔고 있었다. 동네 전체가 적어도 40년 전으로 시계를 되돌린 듯한, 서울 부도심 지역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최후의 ‘박물관’으로 보였다.

 

조선시대부터 이미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들의 집단 거주지역이면서 큰 시장이 있는 최대 규모의 이 동네가 이제 다른 모습으로 싹 탈바꿈할 것이다. 시간이 되면, 마지막 도보여행을 해보시기 바란다. 우리 기억에 담아두는 70년대의 풍경이랄까.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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