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한잔 들게

옆자리 어른이 술을 권한다. 외지 사람이 잔을 받는다. 드르륵, 낡아서 삐걱거리는 알루미늄 문이 열리고 노인 손님이 몇 패 들어온다. 찌개를 끓여서 막걸리를 돌린다. 미지근한 막걸리다. 여그는 차게 안 마셔. 

 

최근 광주에 다녀왔다. 부도심 곳곳의 전통시장이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 시장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남광주시장, 양동시장, 대인시장. 토요일마다 야시장이 열리는 곳도 많다. 청년과 예술가가 결합해서 시장의 분위기를 바꿔 놓기도 한다. 시장의 힘이 아직은 느껴지는 도시다. 이 시장에는 대폿집이 전설처럼 남아 있다. 한 바퀴 돌면서 대폿집들의 면모를 쓱 살펴본다. 어떤 집은 “시장에서 파는 무엇이든 가지고 오면 요리해 드린다”고 써 놓았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이 무렵, 전라도 해안에서 잡은 맛있는 생선과 해물이 광주에 많이 올라온다. 그 귀하다는 노랑가오리도 별거 아니라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누워 있고, 표면이 푸르게 빛나는 제철 삼치며, 굵직한 낙지(대낙지라 부른다)도 억센 힘을 자랑하며 함지에서 용을 쓴다. 가을에 태어난 어린 낙지도 있어, 세발낙지 맛을 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세발낙지는 품종이 아니라 어린 놈을 그리 부른다. 어물전에서 낙지를 구경하고 있으면, ‘아짐’(아주머니)이 세발낙지 먹는 법을 알려준다. 이놈을 다리 쫙 훑어서 한입에 넣어야 한다고.

 

 

장을 봐서 대폿집에 들어선다. 안줏거리를 건네면, 솜씨 있게 쓱쓱 만들어낸다. 낙지를 탕탕, 도마에 쳐서 참기름과 통깨(이 양념은 전라도 음식의 주인공 격이다)를 술술 뿌려서 낸다. 가오리를 쓱쓱 저미고, 병어는 탕을 끓인다. 새꼬막이 수줍게 나와 있어서 연하게 삶아 백숙을 한다. 꼬막은 까먹는 맛이제. 안주를 함께 나누는 대폿집 손님들이 한마디씩 한다. 어디서 오셨느냐, 무슨 일을 하셨느냐 서로 인사를 나눈다. ‘하셨느냐’는 은퇴한 어른에게만 묻는 과거형 질문이다. 그들도, 다 한세상을 힘차게 살아온 양반들. 개인사를 들으며, 사라져버린 시장과 광주라는 도시의 기억을 떠올린다. 대포는 원래 커다란 잔을 의미한다. 막걸리 같은 술을 딱 한 잔 마실 수 있게 큰 사발에 따라서 냈다. 얼른 마시고 일하러 가야 하거나, 가진 돈이 적어서 한 잔밖에 마실 수 없는 사람에게 최적의 소용이었다. 이제는, 다들 술을 천천히 마신다. 안주도 시켜야 한다. 이제 대폿집에서 대폿잔을 볼 수 없게 됐지만 인심은 그대로다. 무슨 술이든 한 병 시키면 안주를 한상 깐다. 싸고 흔한 음식이지만 이쪽 말로 ‘개미진’(맛있는) 것들이다. 김치며 번데기, 어묵탕 같은. 술에 딸려 나오는 기본 안주는 무료다. 이 전통은 오랜 것이다. 조선말의 선술집이나 주막에서도 그랬다는 기록이 있다. 전주의 그 유명한 막걸리골목의 인심이나 통영의 ‘다찌집’의 문화도 전통의 소산이다. 이제는 월세 싸고 직원 안 쓰는, 이런 광주의 대폿집에서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저나 다 사라져갈 대폿집을 기억하고 쓰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데, 참 장한 일이 아닌가 싶다. 대포 한 잔 마시러 광주에 가고 싶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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