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백영옥이 만난 '색다른 아저씨'

(16) 디자이너 조수용

ㆍB급 느낌이 가장 좋아… 남들이 다 망할 거라는 일에 승부 걸죠



사진 _ 홍도은 기자 hongdo@kyunghyang.com




▲ 네이버 초록색 검색창 만들어…

“모든 길과 식당이 대형몰에 잡아먹히는 세상,

‘자본주의 암부’ 없는 기업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해내고 싶어”


패션에 예민한 여자들이 가장 먼저 보는 게 구두란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슈어홀릭’은 아니지만 내게도 구두와 얽힌 이야기가 하나 있다. 우연히 보게 된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구두 브랜드 ‘토즈’는 땅값 비싸기로 악명 높은 도쿄의 오모테산도힐즈에 매장을 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진행 도중 건물의 디자인을 전면 변경해야 할 위기에 처한다. 주변 상인들이나 민원, 고비용이 아니라 느릅나무 한 그루 때문이었다. ‘토즈’는 나무를 베거나 훼손하지 않고 건물 전체를 느릅나무의 나뭇가지를 이용한 디자인으로 설계를 변경한다. 내가 본 사진은 바로 ‘토즈’의 도쿄 매장 앞에 서 있던 바로 그 늙은 느릅나무였다. 그날, 나는 신발장 안에 있던 낡아빠진 내 토즈 플랫슈즈를 바라보다가, 그것을 신고 내가 걸었던 수많은 길들 사이의 아름드리 나무들을 떠올렸다. 


우리는 수많은 브랜드에 둘러싸여 산다. 하지만 2013년 대한민국,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브랜드는 무엇일까. 디자이너 조수용은 인터넷을 켜면 눈앞에 등장하는 네이버의 초록색 검색창을 만들었다. 건축가가 아닌 그는 네이버 사옥인 그린팩토리 건축을 진두지휘했다. 자선사업가일 리 없는 이 남자는 한글 나눔 폰트를 만들어 무료로 배포했다. 네이버 최연소 부사장을 그만두고, 3년 전 독립한 그는 JOH라는 ‘크리에이티브 집단’을 만들었다. 회사는 인천 영종도 을왕리해수욕장 근처에 호텔을 짓고 있다. 가방 마니아인 그는 얼마 전 재봉사까지 고용해 가방을 만들어 판다. 이 남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광고 없는 잡지로 프랑스 칸에서 상도 받았다. 나는 부록 하나 안 끼워주는 1만원 넘는 이 잡지가 절판될까봐 읽지도 않을 잡지를 미리 사놓는 후배를 몇 명 목격했다. 


■ 직원 채용 때 선배들이 일대일 면접으로 뽑아


반듯하게 자란 소년에겐 일찌감치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감각이 있었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소년에게 직접 옷을 고를 수 있게 했다. 그렇게 소년은 교복 조끼에 찍힌 유별난 체크가 싫어 조끼를 바꿔 입고, 금색 단추도 검은색으로 바꿔 달고 다녔다. 인간의 자율성을 신봉하는 이 남자가 가장 싫어했던 게 ‘야간자율학습’. 권위와 서열은 그가 가장 혐오하는 단어다. “자율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직원은 저랑 같이 못 가요. 법인카드 한도를 만드는 것도 일종의 ‘룰’이라 싫어요.” 그는 얼마 전, 식당도 차렸다. “왜요?”라고 물으면 “직원들 밥 먹을 데가 없어서”라는 허망한 대답이 날아온다. 그 식당 ‘일호식(1好食)’의 밥은 모두 현미에 유정란 계란이며 재료들도 친환경적인 걸 쓴다고 하니 남는 장사는 아닐 거다. 


고백하면, 때때로 나는 애플이 그냥 사과였을 때, 블랙베리가 그저 딸기였을 때가 그립다. 디지털은 공허하고, 아날로그가 좋다는 구태의연한 얘길 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레코드 가게에 들러 CD를 사지 않고, 서점에 들러 책을 사지 않던 순간부터 내 삶이 좀 시시해졌단 생각을 끝내 지울 수 없다. 골목과 사람들, 오늘의 날씨가 놓여 있는 풍경들이 삭제된 ‘광 클릭’의 세계에는 이야기가 존재하지도, 작동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좋은 음악이 나오면 ‘Soundhound’ 같은 앱으로 즉각 찾아내 듣는 게 정보를 습득하는 지금의 디지털 문법이다. 하지만 음악을 튼 카페 주인에게 물어 대화를 시도하면 ‘정보’가 아닌 뜻밖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나는 언제나 자신의 선택으로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킨 사람들에게 매혹당하곤 했다. 디지털의 최전방에 서 있던 조수용은 0과 1의 세계에서 벗어나 아날로그라는 대지 위에 선 유랑민처럼 여기저기 깃발을 꽂고 방랑 중이다. 마우스를 광속으로 클릭했던 손이 연필을 손에 쥐고 또박또박 글씨를 쓰는 모양새다. 


- 직원 40명에게 법인카드를 지급하고, 직원은 선배 직원들이 일대일 면접으로 뽑는다고 들었어요.


“전 포트폴리오를 믿지 않거든요. 사람이 믿을 만하고 괜찮으면 일은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직접 사람을 뽑지 않는 건, 그렇게 채용했던 선임 직원들이 저보다 더 꼼꼼히 보기 때문이에요. 재밌는 건 가장 최근에 입사한 친구가 질문도 제일 예리하게 하고, 잘 본다는 거죠. 주방에서 일하는 셰프가 디자이너 뽑는 면접도 봐요. 다른 분야 사람에게 자기 일을 제대로 설명해내는 게 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식으로 면접을 하면 3~4일 정도가 소요되는데, 입사하면 사법시험 패스한 느낌이 들죠.” 


- ‘JOH’는 주로 브랜드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어요. 좋아하는 브랜드가 있나요.


“ ‘무지’란 회사를 좋아해요. 무지는 브랜드가 없다는 뜻의 브랜드잖아요. 극강의 실용주의를 지향하고, 디자이너들에게 과감하게 투자해요. 사실 심플하고 미니멀한 게 좋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그걸 끝까지 밀어붙이는 건 대단한 일이거든요. 나중에 ‘무지’가 집도 팔아요. 땅을 사서 찾아가면 무지가 집을 지어주는 거죠. 그 집이 기가 막혀요. ‘무지 하우스’ ‘무지 플라워’ 그렇게 콘셉트를 갖고 식당도, 카페도 하죠. 상업이라는 게 경계가 없다는 걸 느꼈죠.” 


-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네이버 사옥 건축을 진두지휘했어요. 아름다운 외관도 그렇지만 그린팩토리의 계단에는 칼로리 표가 그려져 있어요. ‘노동’을 ‘운동’의 맥락으로 바꾼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어요. 


“한국에선 전공자가 아닌 사람이 다른 분야의 경계를 넘는 일에 거부감이 많죠. 그래서 말이 늘 조심스러워요. 제 생각에 건축이란 말은 공급자 입장에서 만든 말이거든요. 보통 사람들은 그게 건축인지, 인테리어인지, 도시계획인지에 대한 구별이 없어요. 가구를 잘 배치한 걸 건축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사실 전 어떤 걸 기준으로 건축적이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건축과를 나와야 건축가냐, 라이선스가 있어야 건축가냐, 기준이 불분명해요. 네이버 사옥을 지을 때도 제가 건축 전공을 안 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불안해했어요. 그땐 제 역할이 건축이 아니라, 건축 설계해주는 많은 분들을 한쪽 방향으로 모아가는 역할이었던 거죠. 제 입장에선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고요. 전 크리에이티브가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거라고 봐요. 많이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면서 얻어지는 거죠. 그린팩토리의 주차장을 일례로 들면, 우리가 몇 층에 차를 세웠는지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근데 층마다 소리가 다르면, 아! 새소리 나는 층에 세웠지, 하는 식으로 기억하고 엘리베이터에서 ‘새 그림’이 있는 버튼을 누르면 손쉽게 해결되죠. 전 미술을 전공했지만 그림을 감상할 때도 쇼핑하는 느낌으로 보는 게 더 재밌는 것 같아요. 오랫동안 내 방에 걸어놔야 할 대상으로 그림을 보면 복잡하고 거창한 이론보다 더 정확하다는 거죠.”


- 요즘처럼 ‘네이버’가 신문에 자주 등장한 때가 없었어요. 인터넷 생태계의 파괴자, 검색시장을 왜곡시키고 광고시장을 독점하는 기업으로 말이죠.


진짜 이유는 네이버가 돈을 너무 많이 벌었기 때문이에요. 그걸 얘기 못하니까 딴 이유를 드는 거죠. 사실 시야를 좀 더 넓히면 다른 게 보여요. 과연 네이버를 잡으면 누가 이익을 볼 것이냐의 문제예요. 사람들은 언론사가 이익을 보지 않을까 생각을 하는데, 제 생각에는 구글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을 제외하고 전 세계 거의 모든 포털을 구글이 잠식했어요. 서버가 미국에 있는 구글은 제도에 의해 통제가 되지 않는 서비스예요. 네이버에는 음란성 키워드를 쳐서 나오면 큰일이 나잖아요. 구글은 그렇지 않죠. 전 검색에 대해서도 밤새 토론할 수 있어요. 네이버가 만들어진 즈음에는 뭔가 검색해서 찾을 대상이 없었어요. 개인 홈페이지나 일기, 우체국이나 청와대 홈페이지 이런 것밖에 없었던 거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문서가 없으면 검색도 없단 얘기예요. 그래서 전 세계 비영어권 나라는 아직도 검색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어요. 일본만 해도 일본어로 된 문서가 많지 않아서 좋은 정보를 얻으려면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야 하거든요. 한국은 그걸 네이버가 한 거예요. 백과사전도 넣고, 뉴스나 지식인을 통해 정보를 짜내고 없는 문서를 문서화시켜준 거죠. 비영어권 국가들은 검색을 해도 문서가 거의 안 나오니까 구글이 한 일이 재빨리 번역기를 개발한 거였어요. 근데 사람들이 보기에는 원래 문서가 있었는데 왜 네이버에서만 검색되게 하느냐고 비판해요. 유튜브는 야후에서 검색이 되지 않아요. 그렇게 하려고 구글이 유튜브를 인수한 거고요. 그건 시장의 룰이에요. 근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네이버를 국민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공기관처럼 생각해요. 워낙 인터넷을 많이 하는 나라다보니 드는 착시현상이죠.” 


■ 디지털의 최전방에서 유랑민처럼 새로운 깃발 꽂아


- 디지털 피로감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너무 빨리 변해요.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대세였다가 인스타그램이나 텀블러를 하지 않으면 쿨하지 않은 게 되는 세상이고요. 이럴 때일수록 전 본질이 무엇일까를 자꾸 생각하게 돼요. 


제가 볼 때, 디지털의 순기능은 정보 취득의 시간을 줄여주고,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이용된다는 것 말고는 장점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이 두 가지 장점을 확장해서 사업을 벌이기엔 자본이 너무 많이 들어요. 그래서 전 깨끗이 포기했어요. 네이버 출신이지만 제가 만드는 잡지는 아이패드 서비스도 하지 않고요. 인스타그램만 놓고 보면, 저는 아직 그게 외줄타기라는 생각을 해요.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소중한 추억을 나누세요’라고 하면 가치관이 들어와요. 멋진 순간을 이곳에서 사랑하는 친구와 나눠야겠다, 생각하면 말이 되죠.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돈을 벌까요? 광고를 붙일 거예요. 누가 광고를 하죠? 게임회사예요. 전 아직 이 시장은 가치와 자본이 맹렬히 싸우는 중이라고 봐요. 제가 광고가 없는 ‘매거진B’를 만들게 된 이유는 남들이 광고 없인 아무것도 못할 거라고 했기 때문이에요. 전 지구 평화니 이런 거창한 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기업을 하는 본질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랫동안 같이 일하고 얼굴 보는 것이라고 정의했어요. 그러려면 지구도 오래 가야겠고, 전쟁도 안 났으면 좋겠는다는 거죠. 사실 경영주도, 직원들도, 소비자도 모두 행복해하는 모습을 그린다는 게 불가능해 보이는데, ‘매거진B’에 나오는 브랜드들은 거의 그런 패턴을 갖고 있어요. 흔히 생각하기에 사업적으로 가치 있고 가족적인 분위기면 가난하게 살 것 같은데, 그런 기업들이 오히려 돈을 훨씬 잘 벌어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수용 JOH(제이오에이치) 대표 (출처 :경향DB)


- 매거진B는 브랜드 하나를 선택해서 만드는 잡지예요. 잡지의 제품 사진은 어떻게 촬영되나요. ‘펭귄북스’ 편에선 책들을 전부 비닐 커버링한 애서가의 서재도 등장하더군요. 


“주로 그 브랜드 마니아들을 접촉해서 촬영협조를 받아요.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죠. 물론 해당 회사가 취재 요청을 거부한 경우도 있어요. ‘레고’ 같은 곳이 거절했죠. 취재를 하면 자신들이 검수하겠다고 하는 곳도 있어요. 근데 우린 협조를 안 해주면 그냥 우리 방식대로 해요. 전직 레고 디자이너 찾고, 인터뷰하고. 물론 레고가 협조했으면 더 정확한 현재의 모습이 나갔겠죠.” 


- B는 브랜드의 B인가요.


“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밸런스를 뜻하기도 해요. 전 가격과 실용성과 아름다움과 철학이 균형을 이룰 때,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느낌이 B급이에요. 누구나 선망하고 좋아하는 A급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아주 많이 좋아하는 B급. 가령 사람들이 좋아하는 루이비통은 돈이 있는 사람은 사고 없는 사람은 못 산다는 공감대가 있잖아요? 근데 ‘프라이탁’ 하면 어쩐지 특별한 사람이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이 들죠. 사실 잡지를 좋아해서 엄청 사들였는데 요즘은 잘 안 보게 돼요. 이젠 기사 하나가 나가도 의도가 있고, 팩트 하나를 두고 완전히 다른 기사가 나갈 수도 있단 걸 아니까요. 광고성 키워드처럼 미디어에서 어느 브랜드가 잘되기를 의도하는 것처럼 보이면 필시 광고구나 싶어요.” 


- 하지만 어떤 잡지를 읽는다는 건 단순한 취향을 넘어 삶의 태도를 보는 거잖아요. 


“그걸 사는 행위 자체가 그 사람을 규정하기도 하죠. 사람들이 영어로 된 ‘모노클’ 같은 잡지를 정독할까요? 전 아니라고 봐요. 보통 잡지를 보면 얘는 경제야, 얘는 패션이야, 이런데 모노클은 그 모든 걸 담거든요. 멋있는 사람이라면 정치나 시리아의 난민에 대한 관심도 있으면서 어느 식당이 맛있는 곳인지도 알아야 한다란 가이드죠. 인간이 가진 지적 허영심을 잘 건드렸어요. 소비란 살기 위한 것도 있지만, 그 너머엔 나를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해요. 버킨백을 메고 있는 이효리와 프라이탁을 메고 있는 이효리는 어떤 사람에겐 별 의미 없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굉장한 메시지를 전달하니까요.” 


- 서울 논현동 ‘일호식’ 이후에 한남동 골목에 식당 하나를 더 냈어요. 엄청난 땅값을 자랑하는 곳이죠. 


“바로 그래서 제가 부자처럼 보이는 효과가 생겼죠. 사실은 아닌데! 하하. 게다가 그곳은 주차도 어려워서 임대료만큼이나 발렛 주차비도 비싸요. 강남의 잘되는 식당이 왜 망하는 줄 아세요? 그런 식당 중엔 발렛 컨트롤비가 임대료보다 큰 곳이 많아요. 한국식 뉴 임대료죠. 사실 음식이라는 건 문화잖아요. 제 경우에는 인사동에서 가야금 소리 들으면서 현미밥 먹는 게 크게 재밌진 않아요. 저는 건강하고 의식이 뚜렷할수록 스타일리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러쉬’같이 컬러풀한 친환경 브랜드를 좋아해요. 친환경은 백색, 베이지색에 코튼이란 편견을 과감히 깼거든요. 제겐 남들이 잘 안 된다고 하면 오히려 끝까지 해보려는 승부사 기질이 있어요. 그래서 다들 망할 거라고 장담한 ‘일호식’이나 ‘매거진B’도 만든 거죠. 전 ‘일호식’을 가지고 뉴욕에 갈 거예요. 그게 정확한 글로벌 코드라고 짚었거든요. 건강하게 먹는다는 게 세계적인 트렌드인데 서양식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조리법도 무척 제한적이에요. 서양 쪽은 주로 샐러드만 먹잖아요. 근데 우리에겐 발효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조리법이 있어요. 맛있고 건강에도 좋죠.”


- 두 개의 식당 모두가 찾기 힘든 골목 안에 있어요. 하지만 세상의 많은 길과 식당이 ‘대형 몰’에 잡아먹히고 있어요. 조선시대부터 존재하던 종로 피맛골은 통째로 블록이 씌워져 ‘종로타워’라는 대형건물에 삽입됐죠. 


“전 대형 쇼핑몰이나 백화점의 미래가 밝다고 보지 않아요. 그런 몰이나 프랜차이즈는 산업화되어가면서 흥하는 시기가 있어요.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안정화되지 않은 나라에선 프랜차이즈가 서비스나 맛, 안전에 대한 기준이 되니까요. 예를 하나 들어보죠. 지금은 뚜레쥬르나 파리바게뜨 케이크를 선물로 받으면 어쩐지 성의 없어 보이잖아요. 차라리 동네의 개성 있는 빵집의 빵들이 더 좋아 보이죠. 이전에는 신뢰의 기준이 크고 센 놈이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있어 보이면 작아도 그 사람을 더 믿게 돼요. 믿음의 관점이 바뀌고, 브랜드가 점점 작아진 거죠.” 


- 자본의 총체라 할 수 있는 ‘호텔’을 짓고 있어요. 외관 공사뿐 아니라 객실, 레스토랑, 하다 못해 화장실 안에 놓일 꽃병의 위치까지 조율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은 역할이라고 들었어요. 


운이 좋았죠. 이 일을 하면서 국내의 글로벌 호텔 브랜드들이 적지 않은 브랜드 로열티를 해외에 지불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사람들은 이 브랜드라 역시 서비스가 좋아, 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서비스나 가격정책이 그 브랜드 본사와 상관없는 일도 많구요. 실제 계약이 끝나면 호텔 간판이 바꿔다는 경우도 허다해요. 이건 역설적으로 제대로만 하면 시장에서 가능성이 있다는 거예요. 전 그렇게 판단했고, 남에게 로얄티 주느니 직접 이름을 짓자고 판단했죠. 지금 대림 쪽에서 짓는 비즈니스 호텔은 글래드호텔, 영종도에 짓는 건 네스트 호텔이에요. 영종도는 갈대가 많아서 갈대를 엮은 개념으로 지은 거죠. 


■ 인간과 기업의 성선설 믿는 희귀한 확신범


‘당신이 사랑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당신을 사랑해주는 것. 그것이 성공이다’라는 말을 한 건 워런 버핏이다. 내가 알기로 기적과 관련된 가장 아름다운 정의를 내린 사람은 생텍쥐페리다. 그는 <어린 왕자>에서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너를 좋아해주는 것. 그게 바로 삶의 가장 큰 기적’이란 말을 했다. 성공하는 게 기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성공이 어려운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기적적인 성공’이란 말이 존재한다. 나는 그것이 제대로 된 기적이라면 필연적으로 아름다움을 동반한다고 믿는다. 


뷰티 브랜드 ‘에이솝’은 창립 25주년 기념으로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는 대신 창립한 1987년부터 2012년까지 매해 출판된 도서 가운데 꼭 읽어야 할 책들을 선정해 신문 형식의 자료로 만들어 고객에게 무료 배포했다. 그중에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1989년작 <남아 있는 나날>, 오르한 파묵의 노벨상 수상작 <순수 박물관> 등이 있다. 싱가포르에선 에이솝의 추천 도서를 읽는 북클럽이 생기기도 했다. 캠핑용품 업체 ‘스노우피크’의 호즈키랜턴은 바람이 불면 불빛이 흔들리는 기능이 하나 더 탑재되어 있다. 호즈키랜턴을 들고 캠핑을 떠났던 한 친구는 이 랜턴이 바람에 흔들리던 캠프파이어와 작은 모닥불을 연상시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얘길 했다. 


자본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착취하는 얘기들이 널리고 널린 이 시절에도 아름다운 이솝우화 같은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10년 후, 100번째 매거진B에 ‘JOH’라는 브랜드가 실리면 좋겠어요. 우리 스스로 옳고 아름답다고 믿는 기업 중 하나가 되는 거죠. 전 자본주의의 암부가 조금도 없는 기업이 있다는 걸 확신하고 꼭 증명해내고 싶어요.” 그는 말을 하다가 자주 웃었다. 그때마다 비쭉 솟아난 덧니 아래로 축구를 하다 무릎 꽤 깨져본 소년의 얼굴이 보였다. 극렬한 자본주의 시대에 인간과 기업의 성선설을 믿는 이토록 희귀한 확신범의 나이가 마흔이나 됐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