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사람맛’ 나는 종로 뒷골목

피맛골이 사라진 지 꽤 오래다. 거대하고 멋없는 건물이 그 자리에 들어섰고, 서울시민의 추억도 묻혔다. 언젠가 무지막지한 시장이 또 뽑혀서 뚝딱 가짜 피맛골을 만들어낼지 모르겠지만, 우리 마음속의 피맛골은 끝난 것이다. 피맛골 끄트머리에 있는 육의전박물관은 유리판 아래 유물로 살아남았으나, 피맛골은 어디에서도 되찾을 수 없게 완전히 파괴되었다. 사실 피맛골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멀티플렉스 상영관에 밀린 전설의 단성사와 피카디리를 바라보는 건 중년 이상의 서울시민에게는 아련한 통증이다. 우미관은 또 어떻고. YMCA 뒤편의 학사주점들은 언젠가 닥칠 개발의 삽날을 어떻게 견디어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고갈비에 밀주 같은 막걸리를 마시던 ‘와사등’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데, 박제가 된 추억이라도 건지러 가는 이들이 있는지.

다행스럽게도 종로 거리가 생명력을 완전히 잃은 건 아니다. 피맛골 건너편 동대문 쪽으로 향하는 관철동과 관수동 라인은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았다. 종로3가에서 종로4가, 다시 세운상가까지 이어지는 뒷골목이 그곳이다. 두 사람이 교행하면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좁다. 그래서 이 골목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어깨를 접듯이 마음도 소박해지게 된다. 평균 체중과 키가 훨씬 작았을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놓은 골목이 주는 일종의 역사적 체험이다. 그 골목에 우리가 들인 한번의 발걸음도 쌓이고 쌓여 민중의 역사를 이루어 가리라. 이즈음이 되면, 이 골목에서는 보쌈집들이 흥성하다. 배추, 굴 같은 안주가 제철을 맞았기 때문이다. 장사가 잘되는 집들은 고기를 연신 삶아대느라 골목 안에 뿌연 김을 토해내고 있다. 통영 같은 산지에서 올라오는 굴은 또 얼마나 싱싱한지. 점점 더 달아져서 불만이지만, 무채 넉넉한 보쌈김치에 고기와 굴을 얹어 한 입 싸면 다들 함박웃음이 벌어진다.





최근에는 그 좁은 골목이 흡연가들로 장사진을 이루기도 한다. 실내흡연 금지 이후의 새로운 풍경이다. 이 골목은 오랜 역사답게 다채로운 메뉴가 자랑이다. 갈치조림집이 있는가 하면, 옛 목로주점식으로 진안주든 건안주든 뭐든 술에 곁들여 먹을 만한 것들을 다 파는 집도 많다. 맛 좋은 겨울 삼치와 고등어를 굽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쓴 소주를 연신 들이켜는 주객들이 흐린 창 안쪽으로 보인다.


슬프게도, 골목 술집 주인들의 평균연령이 아주 높다는 것도 이곳의 특징이다. 이 골목에서 잘하는 안주 중에는 닭 한 마리도 있다. 닭을 삶아서 뜯고, 다 먹고나면 면을 말아내는 이 요리는 바로 종로에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도성장기를 지나면서 배고픈 월급쟁이들을 달래준 전설적인 안주라고나 할까. 좁고 기다란 골목이 방산시장, 광장시장까지 이어진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빈대떡집, 육회집의 명성이 이곳을 오래 불 밝히게 만들었다. 그 덕에 심야 3차 주당들의 단골이 되기도 한다. 부디 이 골목이 살아남아서 후대에게 전해지기를 소망한다. 사라진 것은 피맛골로 족하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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