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허지웅의 영화로 세상읽기

‘설국열차’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여기 세 가지 장면이 있다. <설국열차>가 우리 세계에 관한 어떤 가능성, 나아가 명백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비전은 이 세 가지 장면 없이 성립되지 않는다. <설국열차>가 단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의 혁명 서사를 지루하고 게으르게 답습한다고 투덜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해석은 언제나 개별의 몫이다. 그러나 적어도 <설국열차>라는 본연의 이야기가 닿고자 하는 종착역은 그보다 훨씬 멀리 서 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장면을 짚어보는 작업을 통해 우리는 <설국열차>라는 모험이 과연 제시될 만한 비전인지 혹은 그저 서투른 선문답에 불과한지 다시 한 번 가늠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첫 번째 장면은 예카테리나 다리 시퀀스다. 정확히는 해피 뉴 이어 대목이다. 커티스의 꼬리칸 무리와 윌포드의 복면 부대가 혈투를 벌이던 도중 열차가 예카테리나 다리에 당도한다. 열차가 예카테리나 다리에 도착했다는 선언이 들려오자 모두가 자동적으로 싸움을 멈춘다. 복면 부대는 경쾌하게 새해를 카운트한다. 꼬리칸 무리는 새해가 왔음을 실감하며 주춤거린다.

 


세계대전 와중에도 크리스마스나 새해만큼은 암묵적으로 휴전했던 인류의 전사를 떠오르게 만드는 유머다. 그러나 <설국열차>의 세계관 안에서 이 장면은 색다른 의미를 갖는다. 지구가 공전하듯 윌포드의 열차는 지구 위의 궤도를 회전한다. 지구가 태양을 두고 한 바퀴 돌 때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듯 윌포드의 열차가 예카테리나 다리 위에 닿으면 새해가 선언된다.



즉, 윌포드의 열차는 ‘인류’인 동시에 그 자체로 ‘지구’이며 ‘시간’이고 ‘세계’다. 예카테리나 해피 뉴 이어 장면에서 우리는 두 집단 사이에 최소한의 규칙과 관습이 느슨하게나마 공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쪽은 지배하는 자들이다. 다른 한 쪽은 지배당하는 자들이다. 한 쪽은 현상을 유지하려는 자들이고, 다른 한 쪽은 못살겠으니 바꿔보자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쪽이나 저쪽이나 이 세계의 질서와 체계를 존속시키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 대목은 꼬리칸과 머리칸이 미시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 같지만 거시적으로 어떻게 공모하고 있었는지 드러나는 후반부 서술에 관한 복선이다.



두 번째 장면은 커티스가 윌포드에게 설득당하고 있던 중 열차 바닥 밑의 좁고 작은 공간에서 어린 아이를 발견하는 대목이다. 윌포드는 커티스를 설득하는데 성공하고 있던 중이다. 커티스는 꼬리칸의 지도자였던 길리엄이 사실 밤마다 핫라인으로 윌포드와 통화하며 열차, 즉 이 ‘세계’를 존속시키기 위해 공모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더불어 윌포드로부터 자신의 뒤를 이어 열차의 엔진을 관리하는 후계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받는다. 커티스는 그의 요청에 흐느낌으로 응답한다. 그러나 요나가 뛰어 들어와 바닥을 들어내고 그 안에서 티미를 발견하는 순간, 커티스는 더 이상 두고 볼 것 없다는 듯 결심을 내린다.



영화 <설국열차> 포스터. _ CJ엔터테인먼트 제공


▲ 열차는 폭력적 세계의 축소판이나, 탈출의 가능성을 말한다



<설국열차>의 세계관이 조지 오웰의 <1984>로부터 많은 부분을 수혜받았음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해석이다. 사실 <1984> 이후의 어느 디스토피아 텍스트가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겠는가.



<1984>에서 주인공의 조국인 오세아니아는 유라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선전한다. 실제로 날마다 폭탄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그러나 사실 거기 진짜 전쟁은 없다.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결속이 필요하다. 결속을 위해서는 공포가 요구된다. 오세아니아는 유라시아와 공모해 실제 존재하지 않는 위기를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그 자신의 세계를 존속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열차라는 세계의 존속을 위해 윌포드와 공모하고 있던 길리엄을 연기하는 배우가 존 허트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존 허트는 <1984>의 영화 버전에서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를 연기한 바 있다. 그는 또한 역설적이지만 길리엄 캐릭터의 연장선상에서 당연하게도(사실 지금 <설국열차>를 느슨하고 나이브한 혁명 서사라고 폄훼하는 시선들이 정작 향해야 마땅한) <브이 포 벤데타>에서 유사 빅브러더 캐릭터인 챈슬러 셔틀러를 연기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길리엄이라는 이름은 <1984>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 <브라질>의 감독 테리 길리엄을 즉각적으로 연상시킨다.



사실 이 공모의 혐의는 인류 역사이기도 하다. 지키려는 집단과 바꾸려는 집단.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귀족과 부르주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정규직과 비정규직. 인류의 역사는 끝없는 투쟁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 투쟁과 역전의 대목마다 인류의 세계는 다시 한 번 존속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왔다. 커티스가 윌포드의 말에 솔깃했던 건 당연한 일이다. 그가 윌포드의 뒤를 잇는 것으로 이 혁명은 완수될 수 있다. 커티스가 운영할 미래의 열차는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커티스는 이 세계의 주도권을 누가 손에 쥐든, 누가 나름의 정의를 주장하고 어떤 종류의 공평함이 실현되든, 실은 은밀하게도 그리고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완전무결하게 착취하지 않고서는 기능하거나 존속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게 바로 이 장면이다. 커티스는 더 두고 볼 것도 없이 선택을 한다. 그는 열차를, 이 세계를 파괴하기로 결정한다. 기존 체제의 유지 혹은 역전이 아닌, 체제 자체를 포기하는 순간이란 어떻게 찾아오는가. <설국열차>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세 번째 장면은 폭발이 일어나고 열차가 탈선하는 순간, 커티스와 남궁민수가 상호 어떠한 합의도 없이 요나와 티미를 사이에 껴안아 지키는 대목이다. 우리도, 우리의 전 세대도, 그 전 세대의 이전 세대도 같은 것을 고민했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다름 아닌 가능성이다. 우리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나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커티스와 남궁민수는 지금의 체계와 규칙을 물려주고 그 안에서 아프니까 청춘이고 밖은 추우니까 열차는 달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가능성을 물려준다. 그것은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설국열차>는 이 대목에 이르러 기존 체제를 파괴하는 쾌감에서 방점을 찍었던 영화 <파이트 클럽>의 이후를 모색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세계는 폭력적이지만 그 체제는 분명한 안온함을 제공한다. 그것을 벗어난 인간에게 희망이란 가능한 것일까. 요나는 ‘큰 물고기’라는 신의 형벌 안에서 탈출하고 생존했던 인간의 이름이다.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나는 <설국열차>가 언젠가 위대한 영화의 리스트 어느 구석에서 반드시 발견될 것이라 생각한다.





허지웅 |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