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허지웅의 영화로 세상읽기

‘호스텔’이 과연 범인일까

사람들은 낯설고 알 수 없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들춰보자.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천진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포와 타도의 대상으로 일찌감치 낙인찍혔던 건, 사람들이 보기에 그가 ‘나와 다른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것을 향한 공포와 혐오는 곧잘 너무나 쉬운 이유나 해법을 만들어내는 태도로 연결된다.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이를 두고 서둘러 자극적인 동기와 인과관계를 ‘창조해내는’ 태도 말이다.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의 모습에서 이와 같은 양상은 매우 흔하게 노출된다. 특히 속칭 ‘10대 오원춘 살인사건’ 혹은 ‘용인 엽기 살인사건’으로 불리고 있는 최근의 사건과 같이, 동기 자체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현장검증 모텔로 들어가는 엽기살인 피의자



사건이 알려진 직후 별안간 수 년 전의 영화 한 편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일라이 로스가 연출한 영화 <호스텔>이었다. <호스텔>은 동유럽에 배낭여행을 떠났던 젊은이들이 납치를 당해 공장에 감금되고, 재력가들이 이곳을 찾아 대금을 지불한 뒤 납치된 여행객들을 고문하는 내용을 그린 영화다. 



‘용인 엽기 살인사건’의 피의자가 취재진과 대화하던 도중 이 영화를 언급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용인 살인사건, 시신 뼈만 남아… 영화 호스텔 보고 충동 느꼈다” “용인 살인사건 피의자, ‘영화 호스텔 봤다’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관심 집중” “10대 엽기 살해범은 공포영화광” “용인 살인사건 ‘상영금지 호스텔’ 모방? 무슨 내용이길래”와 같은 제목의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상황을 들여다보면 어렵지 않게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다. 피의자는 먼저 <호스텔>이나 잔인한 영화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기자가 먼저 굳이 콕 집어 “<호스텔>과 같은 잔인한 영화를 즐겨 보느냐”고 질문했다. 그 질문에 대해 피의자가 “봤다. 공포영화를 자주 본다”고 대답했다. 이어 “나도 해보고 싶단 생각 안 해봤어요?”라는 질문에 “한 번쯤은 해봤어요”라고 말했다. 유도 질문들과 유도된 답변이다. 평소 공포영화광인 피의자가 영화를 모방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듯한 지금의 보도 내용은 사실관계를 크게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최근 보도내용들과는 달리 영화 <호스텔>의 내용은 지금의 사건과 닮은점이 없다. 사체 훼손을 다룬 공포영화라면 얼마든지 다른 사례를 들 수 있다. 차라리 <기니어피그> 시리즈를 언급하는 게 상황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호스텔>은 그런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호스텔>은 단지 고문과 살인을 전시하는 영화가 아니라, 젊은이들이 공장에 납치되고 돈을 지불한 재력가들에게 유린 당하는 내용을 들어 자본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사람들을 착취하는가 보여주는 우화에 가깝다.



영화 <호스텔>의 한 장면.




사실은 이랬을 것이다. 별 동기가 없다는 피의자의 말에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내고 싶은 기자들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 중 한 기자가 자신이 제목을 알고 있는 영화 가운데 가장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호스텔>을 언급했다. 피의자는 봤다고 대답했다. 심지어 공포영화를 자주 본다고 말했다. 멀쩡하게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그 상황에서 애초 그런 질문을 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저 문답만 두고 보았을 때도 이 사건이 공포영화광의 <호스텔> 모방범죄라는 추측 또한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자극적인 것이 필요한 기자들이 들었을 때, 이는 완전하고 명쾌한 인과관계로 변모한다. 마술 같은 일이다.



공포영화를 많이 봐서 살인마가 된다면 나는 지금쯤 하루 세 끼 인육만 먹고 있을 거다. 언론은 늘 쉽고 빠른 인과관계를 지어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이라도 세상이 그리 명쾌했던 적이 있는가. 콜럼바인 총기난사 사건 때는 게임과 마릴린 맨슨의 음악이 도마에 올랐다. 레이디 가가는 그 자신과 그녀의 음악이 게이를 양산한다는 공격에 시달린다. MBC는 게임이 폭력을 조장한다며 애꿎은 PC방의 전원을 내려버렸다. 조선일보는 학교폭력이 웹툰 때문이라는 기획기사를 내보냈다. 총기난사가 마릴린 맨슨 때문이고 게이가 레이디 가가 때문이고 학교폭력이 웹툰 때문이고 연쇄살인이 영화 때문이면 내가 오늘 배탈이 난 건 무엇 때문이냐. 마스터셰프 코리아?



어떤 행동에 단 한 가지 명백한 원인만이 존재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다 못해 날씨부터 사소한 대화, 어느 생각없는 기자가 써내려간 기사 한 줄이 안겨준 짜증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행동을 가능케하는 원인에는 수없이 많은 요소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 하나로 유력한 이유를 만들고 매우 명확한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것처럼 포장하면 정작 문제의 본질은 휘발될 수밖에 없다.



끔찍한 사건의 범인을 격리하고 처벌하는 건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사회 정의다. 그러나 명백한 이유를 만든답시고 자극적인 수사와 무리한 추정에 바탕해 엉뚱한 데에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범인을 그냥 ‘괴물’로 만들어버리면, 우리는 동일한 범죄가 반복되는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된다. 그렇게 되는 순간 사건은 더 이상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우리 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다른 철창 속 괴물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서커스가 철창 안의 괴물을 전시하듯 담론은 사라지고 프릭 쇼(freak show)만 남는다. 이때 진짜 괴물은 살인범인가, 언론인가.




허지웅 |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