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허지웅의 영화로 세상읽기

분노를 도매가로 팝니다


항상 가장 잘 팔리는 건 공포다.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MSG를 먹으면 건강이 나빠진다. 마릴린 맨슨을 들으면 총기난사범이 된다. 게임을 하면 폭력적이 된다. 학교폭력의 원인은 웹툰이다” 등. 공포 마케터들은 특정 결론에 이르기까지 작용하는 수많은 원인과 맥락을 배제한 채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너의 불행이 초래되었거나, 혹은 곧 초래될 것이라고 겁 주는 방식으로 공포를 판매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분노를 파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에 이렇게 큰 부조리가 있는데 지금 잠이 옵니까. 당신이 부끄럽지 않은 부모이자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당장 분노하고 주머니를 여세요.” 이와 같은 딜러들의 마케팅 포인트는 실제 사회의 부조리를 규명하기 위해 골몰하고 행동하는 이들과는 달리, 그 실체와 연쇄작용에 관해 정확하게 설명하고 상대의 판단을 기다리기보다는 사실 관계를 뭉뚱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죄의식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깨어있는’ 자들의 연합에 동참하기를 유도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한 무협지적 정서는 사실 관계에 근거한 타인의 선의와 의지를 도매금으로 망가뜨리고 나아가 세상을 혼돈으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그 와중에 건사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위안뿐이다.



최승호 감독의 <노리개>는 한국영화 장르 목록에 새로운 항목이 추가되었음을 알리는 영화다. 그 장르의 이름은 ‘분노’다. <노리개>라는 기획이 성립할 수 있었던 건 그에 이르는 몇 가지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징후였다. 이 징후들은 <노리개>라는 영화가 정확히 그 영화들의 연장선 위에 있음을, 혹은 그러기를 바란다는 홍보 문구들로부터 정확히 호출된다(“<26년> <도가니>에 이어 또 하나의 감춰진 진실을 고발하는 영화!”). 우선 필자의 과거 글에서 발췌한 몇가지 문장을 통해 점층적으로 그 위험이 강화되고 있는 징후들을 살펴보자.



<도가니>: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근사한 것이다. 아주 가끔이지만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 영화로부터 분노를 얻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의 규탄을 요구하고, 영화의 제목을 가져온 이름의 법을 만드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의 분위기는 분노와 연민의 유행에 가깝다(한겨레).”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 “<남영동 1985>는 서로 다른 믿음과 당위를 가지고 있는 자들 사이에서 드러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성찰과 고민이 배제되고 가해와 피해의 갈등만이 남아있는 영화다. 감독의 전작인 <부러진 화살>이 진실이란 얼마나 어렵고 복잡하며 함부로 주장될 수 없는 것인가에 대해 외면하면서 사실관계를 단순화시켜 일방적인 선과 악의 문제로 탈바꿈시켜버렸던 것처럼 말이다(주간경향).”



<26년>: “<26년>의 상황은 최소한의 완성도를 담보하기 위해 필요한 절대적인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데 따른 결과물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영화가 그 ‘절대적인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것인지, 혹은 안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셜펀딩 단계에서부터 이 기획은 괴상했다. 감독도 없었다. 배우도 없었다. 원작의 명성과 2008년에 쓰여진 시나리오만 있었다. 그나마 이 2008년의 시나리오라는 것도 당시 물가로 62억원 예산에 맞추어 쓰여진 것이었다. 우선 연출자를 정하고, 새로운 추정 예산과 4년이라는 시간 차를 메꿀 비전에 기반을 둬 시나리오를 다시 썼어야 했다. 그런데 모든 게 이상하리만치 성급했다(주간경향).” “영화 외부의 성립된 조건으로부터 공분, 즉 추진력을 얻어 부족한 영화의 함량을 무마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실의 정치에 영향을 끼치고자 만들어진, 정치영화의 조건이란 무엇인가. 좋은 정치영화의 조건은 다름 아니라 좋은 영화의 조건과 같다. 선과 악을 단순화시킴으로써 이야기의 고민을 축소시켜선 안된다. 현실정치에 영향을 끼치겠다는 목적의식에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침해당해선 안된다(GEEK).”



영화 노리개



<노리개>는, 이를테면 이 방면의 ‘끝판왕’이다. <노리개>는 매우 명확하게, 고 장자연 사건으로부터 거의 모든 서사를 가져온 영화다. 주요 인물들의 이름마저 실제 사건 관련자들을 연상시킬 수 있게 처리되어있다. 이를테면 고 장자연은 정지희로, 이상호 기자는 이장호 기자로, 고 장자연의 매니저 유장호는 이장호로 처리하는 식이다. 언론사 사주와 기획사 대표, 드라마 PD가 주요하게 언급되는 것도 고 장자연 사건으로부터 수혈된 것이다. 극 중 이장호 기자는 방송사에서 퇴출되고 인터넷 언론 ‘맨땅뉴스’를 운영 중이다. 이는 이상호 기자의 ‘고발뉴스’와 정확히 겹쳐진다.



그럼에도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은 이 영화가 실제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애써 강조한다. 아마도 명예훼손 피소를 우려하는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노리개>는 관객의 분노를 추동할 수 있는 대목은 실제 고 장자연 사건으로부터 가져오면서 특정 장면들은 필요 이상의 상상을 동원해 매우 자극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으로 실제 사건의 피해자를 되레 능욕한다.



이를테면 도구를 사용해 여배우와 성행위를 하는 언론사 사주의 모습을 보자. 이 장면에 대해 감독은 인터뷰에서 “어떤 사실 관계를 가지고 그렇게 시나리오를 쓴 것이 아니라 최대한 세게 뽑기 위해 도구를 사용하는 장면을 썼을 뿐”이라 답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단한 당위를 갖고 있는 듯 보인다. 그는 해당 인터뷰에서 “지금은 내가 <노리개>를 만들면서 가진 마음을 관객들이 오독만 해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라 말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진심은 결국 그의 주관일 뿐 사실관계에 근거한 객관일 수 없다. 그에 대한 관객의 의견이 ‘오독’일 거라 생각하는 판단으로부터 연출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자살한 탤런트 장자연의 문건 (경향DB)


그저 자극적일 뿐 영화적 미감도, 작가적 비전도, 극적 완결성도 없는 작품을 뜬금없는 지사 코스프레로 옹호하거나 공감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초반에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 장소, 단체, 사건 등은 실제와 관계가 없다. 이 영화는 가공의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그래 놓고 말미에는 “이 영화 속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다”라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서술의 괴리 사이에서 실제 고통받는 건 명확하게 호출된 실존인물의 명예와, 이와 유사한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실을 알리는 데에는 게으르고 그것을 장르적 묘사라는 미명 아래 최대한 자극적으로 풀어내는 장사꾼들의 들끓는 ‘진심’ 안에는, 그 어떤 종류의 정직하고 의로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