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허지웅의 영화로 세상읽기

서로에게 상처주는 ‘정의로운 폭력’

한국 사회에는 나와 생각이 다른 타자가 정의롭지 않을 것이라 여기는 습속이 있다. 그래서 종종 법상식을 상회하는 언어 폭력이나 명예 훼손, 신상 공개와 같은 일들이 정의롭지 않은 자들에 대한 단죄의 방식으로 집행된다. 정의롭지 않은 자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이러한 폭력은 늘 떳떳하다. 가해자들은 되레 무협지에 등장하는 영웅이나 근대의 지사, 혹은 저널리즘의 보루로 스스로를 과장되게 치장한다.



이는 분단국가라는 사실관계로부터 87년 체제의 한계에 이르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 안에서 만들어진 태도다. 이러한 경향은 진영을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이 상반된 정의로움에 대해 이쪽에선 적반하장이라 생각한다. 저쪽에선 이중잣대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서로 끊임없이 상대가 악마임을 주장해야 자기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그림을 그려보자면 정의롭지 않은 상상의 적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두들겨 패는 것으로부터 진영의 존재 이유와 생명력 자체를 수혈받는 형편이다. ‘깨어 있는 시민’들과 ‘수꼴’은 그렇게 공생한다. 양쪽으로부터의 폭력을 ‘정의롭지 않다’는 이유로 견디며 세상에서 제일 비열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회의론자들에게 한국은 그다지 살 만한 공간이 아니다.




여기 사례를 하나 살펴보자.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사진)이 최근 8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이 영화는 개봉하기 전부터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사이트에서 평점 테러를 당했다. 영화를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몰려와 <지슬>에 대해 박한 평점을 쏟아부은 것이다. 영화 <지슬>이 제주 4·3 사건을 다뤘기 때문이다. 제주 4·3 사건에 대한 영화니까 응당 특정 진영에 치우친 선동 영화일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평점 테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한 줄씩 달아놓은 감상의 변을 보면 하나같이 영화를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주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니다. 단지 어떤 소재를 다루었다는 이유 만으로 만듦새에 관한 평가는 유보되고, 관객이든 언론이든 평단이든 그 영화에 대해 발언하는 것으로 시대와 사회에 동참하고 있다고 자족하는 판타지가 존재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영화의 함량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매체가 상찬해주고 “가슴이 먹먹합니다” “잊지 맙시다” “기억합시다”와 같은 피드백이 뒤따른다.



가까이는 영화 <26년>과 같은 사례가 있다. <26년>은 이야기의 파쇼적인 측면은 미뤄두더라도, 대선 전에 개봉하려는 무리한 스케줄에서 기인한 제작 과정의 문제가 상식 밖의 만듦새에 그대로 반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관객의 ‘뜨거움’에만 매달린 영화였다. <26년>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의 글을 쓰면 “영화를 머리로만 보고 가슴으로 보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지슬>에 대한 평점 테러를 그저 병적으로만 밀어붙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들은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 여길 것이다. <26년>을 상찬했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영화 <지슬>의 한 장면.


▲ 4·3 사건 이유로 ‘지슬’에 평점테러…

진실을 가리고 증오 경쟁 부추겨



이러한 증오의 경쟁 안에서 정작 사안 자체의 진실은 괴리되기 마련이다. 여기서는 영화가 그렇다. 평점 테러를 한 사람들의 짐작과는 달리, <지슬>은 제주 4·3 사건의 개요와 전말을 특정하게 편향된 의도에 맞추어 뜨겁게 벼르고 호소하는 영화가 아니다. 무분별하게 편을 나누어 분노를 추동하는 영화도 아니다. 선과 악을 단순화시킴으로써 이야기의 고민을 축소시키는 영화도 아니다. <지슬>은 죽일 이유가 없는 이들과 죽을 이유가 없는 이들의 초상을 흑백의 이미지 안에서 위령제의 형식을 빌려 담담하게 그려내는 영화다. 미학적인 차원의 매력이나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의 미감, 연기의 균질함을 통제하는 지도의 문제에 있어서 도전적이고 독창적이며 완전히 제어된 작품이다.



제주 4·3 사건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남로당 제주도지부와 중앙당 사이에 협의가 있었는지, 시대배경을 감안할 때 좌익을 학살하기 위해 다수의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킨 것이 정당한 것인지 등의 문제는 진영의 입장에 따라 그 의견과 평가를 달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서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관계를 부정할 자는 아무도 없다. 토벌대에 쫓겨 산속에 숨은 제주도민들이 감자를 나누어 먹으며 버틴 며칠, 학살 속에서 괴물이 되거나 관찰자가 되어가는 군인들의 며칠이 이 영화가 그려내는 이야기의 전부다. 도민과 군인을 가리지 않고 그들이 죽어 사라지고 없는 공간을 조용히 비추며 부적을 태우고 영혼을 달래는 것이 이 영화가 수행하고자 하는 역할의 전부다.



<지슬>의 사례는 진영의 테두리 안에서 ‘정의로운 폭력’을 서로에게 행사하는 일이 결국 사안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계 없이 이루어지는 증오의 강강수월래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지슬>이 흑백인 것에는 미학적인 목적과는 무관하게 사유 가능한 혐의가 있다. 흑백의 이미지는 칼라 이미지와는 달리 그 안에서 다루어지는 사물들을 서로 완전히 다른 개별의 무엇으로 담아내지 않는다. 흑백의 이미지 안에서 그들은 명암의 정도에 따라 조금 더 검거나 밝을 뿐, 결국 동류의 무엇이다. <지슬>은 동류의 무리들이 상대를 나와는 전혀 다른 무엇으로 대상화해가며 극단적으로 갈등했던 사건을, 바로 그 흑백의 이미지 안에 담아내는 역설을 통해 오직 영화만이 도달할 수 있는 성취에 이른다. 한 편의 영화를 두고 정의로운 이유로 상찬하는 이들과 정의로운 이유로 비토하는 이들을 흑백의 이미지 안에 담아내 그들에게 보여주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하다.



허지웅 |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