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허지웅의 영화로 세상읽기

잡스와 게이츠, 모방과 혁신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일까. 아니 요즘 유행하는 혁신이라는 단어를 가져와보자. 모방은 혁신의 어쩔 수 없는 그림자일까.

 

최근 삼성은 다시 한번 특허 침해 소송에 휘말렸다. 이번에는 애플이 아니었다. 다이슨이었다. 다이슨은 삼성의 신제품 ‘모션싱크’가 자사의 기술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청소기가 방향을 전환할 때 재빨리 회전할 수 있게 해주는 다이슨의 기술을 삼성이 가져다 썼다는 것이다. 이에 삼성은 적극 대응할 것이라 밝혔다.


사실 후발 주자가 이미 그 영역에 있어서 일종의 생태계를 창조해낸 선두 주자를 모방하는 건 거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경쟁은 고사하고 시장에 진입조차 할 수 없다. 물론 스스로 이미 글로벌 일류 기업이라고 주장하고 또 그에 어울리는 지위를 누리면서 정작 실무에 있어 여전히 과거의 행태를 답습하고 있는 쪽이라면 법으로 어찌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허세’나 ‘양아치’라는 욕을 먹는 걸 억울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노조도 산재도 인정하지 않는 또 하나의 가족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무튼 이 방면에 있어서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는 이미 유명한 대화록을 남긴 바 있다. 목격자와 당사자의 증언에 따라 그것이 전화 통화였는지, 혹은 주차장에서 벌어진 것인지 말이 나뉘지만 내용에는 별반 큰 차이가 없다.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널 망가뜨려버리겠어, 너는 매킨토시를 베꼈어!” “애초에 너도 제록스에서 베낀 거잖아!”

 

최근 애시턴 커처가 스티브 잡스를 연기한 영화 <잡스>가 개봉한 바 있다. 잡스를 흡사 기인처럼 살다 떠난 신세기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처럼 다룬 이 영화에 대해선 사실 별 할 말이 없다. 짧게 언급한다면, <잡스>는 영화라는 매체가 누군가의 인생 혹은 그 일부분을 소재 삼을 때 하지 말아야 할 모든 종류의 실책을 꼼꼼하게 하나하나 남김없이 범하고 있는 망작이라 할 만하다. 이 영화는 스티브 잡스를 신화가 아닌 모범적인 실수의 교과서로서, 그래서 더욱 기억하고 사색할 수 있는 사건으로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바람을 한데 모아 있는 힘껏 구겨놓고선 마침내 먼지가 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을 때까지 맨발로 짓밟아대는 작품이다. 거리를 떨어뜨려 객관화시켜야 할 대상을 콘서트 무대에 올리고 싶어 하는 카메라의 시선에선 어떤 종류의 성찰도 발견할 수 없다. 스티브 잡스의 인생 중 가장 굴곡진 십수년을 소재로 삼은 영화 가운데 (아직 에런 소킨의 스티브 잡스 영화가 등장하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을 꼽는다면 역시 마틴 버크의 TV영화 <실리콘밸리의 해적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듯 이 영화는 실리콘밸리의 총을 들지 않은 날강도들-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이 어떻게 기회를 잡고 모방으로 혁신을 이루어냈는가에 대한 흥미롭고 유쾌한 리포트다. 이 영화는 사실상 스티브 잡스에 의해 인증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실리콘밸리의 해적들>은 1999년 맥월드 엑스포에서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됐다. 이날 프레젠테이션은 스티브 잡스가 하기로 되어 있었다. 스티브 잡스와 그의 신제품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무대 위에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명이 꺼지더니 어떤 영화의 프리미어 영상이 상영되었다.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의 악연을 다룬, 바로 <실리콘밸리의 해적들>이었다. 사람들은 손뼉을 치고 좋아했다.

 

 

영화 <잡스>의 한 장면.

 

▲ 모방 통한 혁신은, 같이 먹고 살 수 있는 생태계 만들어야

 

영상이 끝나고 장내 불이 들어오자 익숙한 차림의 남자가 무대에 나타났다. 검은 터틀넥 상의에 청바지를 입은 그는, 그러나 잡스가 아니었다. 영화 속에서 잡스를 연기한 배우 노아 와일이었다. 그가 잡스의 흉내를 내기 시작하자 웃음과 환호 소리로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그때 무대 오른쪽에서 진짜 스티브 잡스가 나타나 외쳤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지, 내가 언제 그렇게 했어!” 와일은 “당신 아직도 총각은 아니죠?”라는 말을 남기고 박수를 받으며 퇴장했다.

 

나는 에런 소킨이 <소셜 네트워크>를 쓰는 데 있어서 <실리콘밸리의 해적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수혈받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다. 대표적인 IT영웅들이 등장한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여기에는 탄생 비화와 인간관계, 이를테면 배신, 그리고 특히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이야기가 주요하게 다루어진다. 영화의 만듦새는 꽤 인상적이다. 스티브 잡스가 역사적인 1984년의 매킨토시 광고를 소개하는 대목으로부터 시작해, 1997년 바로 그 자리에서 마이크로소프트에 항복하는, 아니 동맹을 선언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 이 영화는 근사한 캐스팅과 경쾌한 편집, 모나지 않은 흐름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역시 잡스와 게이츠가 서로 퍼붓는 장면이다. 잡스는 게이츠가 매킨토시의 운영체계를 그대로 베껴 윈도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한다. 이 글의 서두에 언급한 그 대화록이 여기서도 등장한다. “넌 매킨토시를 베꼈어!” “너도 베낀 거잖아!” 잡스는 할 말을 잃는다. 게이츠는 자리를 떠난다. 맞다. 잡스는 마우스로 작동하는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의 아이디어를 제록스에서 훔쳐왔었다. 그리고 그것을 빌 게이츠가 다시 훔쳤다.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혁신은 오리지널리티가 아닌 일종의 미감과 순발력으로부터 발휘되는 것인지 모른다. 요는 서드 파티 혹은 개발자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같이 어울려 먹고살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광고 문구마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유행가 후렴구처럼 ‘혁신’을 가져다 붙이는 한국의 대기업들이 그럴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