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허지웅의 영화로 세상읽기

평범한 어른이 되는 법

인간은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조금씩 죽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로잡힐 과거는 늘어간다. 후회를 남기지 않는 죽음 따위는 근사한 문장 안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지막 순간, 인간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멀찌감치 초과해버린 과거의 무게에 눌려 버둥거리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스꽝스럽지도 비장하지도 않은 그냥 인류, 라고 부를 만한 광경이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다는 건 자기 주변을 책임질 일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책임을 진다는 건 말처럼 그리 고상한 일이 아니다. 더럽고 치사한 일이다. 내 소신이 아니라 남의 소신을 지켜주어야 하는 일이다. 나이 오십에 누군가는 백가지를 책임져야 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열가지를 책임지고 있을 테다. 그러나 그것은 각자 짊어질 깜냥이 되는 과거의 무게 차이일 뿐 절대량으로 우위를 따질 일은 아니다. 아름답게 나이 먹을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다. 결국 매순간 과거를 떠올리며 조금씩 죽어가는 길을 피해가기란 요원한 노릇이다. 피할 길을 찾을 수 없다면 짊어지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책임지지도 짊어지지도 않겠다며 뭐랄까 인류, 라는 단어를 내팽개쳐버리는 사람들이다. 현대사회라는 것이 운명공동체이다보니 평범한 어른이 된다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나잇값만이라도 해주었으면 하는 사람들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지” 같은 말을 떠벌이는 걸 지켜보는 일은 곤욕스럽다.

 

후루야 미노루의 작품세계는 늘 이와 같은 화두를 관통해왔다. 그의 초기작이자 출세작인 <이나중 탁구부>는 막무가내의 화장실 개그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조차 정수는 어른들의 세계를 향한 막연한 동경과 현실과의 괴리, 그리고 소년들의 왁자지껄한 난장 이후에 찾아오는 덧없음에 있었다.

 

초창기 후루야 미노루 작품의 주인공들은 대개 무책임한 어른들의 영향 아래 놓여있으되 자기 힘으로 삶을 일구어내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곤 했다. 나아가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하고, 그렇다면 좋은 어른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모습이 종종 포착되었다. <크레이지 군단>은 <이나중 탁구부>에서 <그린힐>에 이르는 초기 3부작 가운데 그러한 메시지를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낸 역작이었다. 주인공 형제가 아저씨에게 두들겨 맞고 실컷 눈물을 쏟은 다음 얼른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음 발걸음을 재촉하는 <크레이지 군단>의 마지막 한 컷은 영화 <그래비티>에서 지구 위를 두 다리로 버티고 일어선 샌드라 불럭의 마지막 장면과 비견될 만한 것이었다.

 

‘어두워졌다’고 평가되는 중기 이후의 작품들에서 이와 같은 화두는 더욱 본격화된다. <두더지>에서 <시가테라> <심해어> <낮비>에 이르기까지, 후루야 미노루의 주인공들은 더 나은 인간, 공동체에 필요한 사람, 최소한 평범한 어른, 아니 평범한 어른이라는 이상향을 향해 골몰한다. 혹자들은 후루야 미노루의 근작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초라한 남자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멋진 여자에게 구제되는 이야기의 동어반복이라고 비판한다. 확실히 그런 혐의가 있다. 다만 후루야 미노루가 방점을 찍는 건 그녀에게 구제되는 그, 가 아니다. 이것은 주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책임을 지는 행동의 필요성을 깨달으면서 스스로를 구제하는 나, 의 이야기다.

 

소노 시온의 <두더지>는 후루야 미노루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원작의 주인공은 평범한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소년이다. 그러나 이미 그럴 수 없을 것이라, 실패한 인생이라 생각하고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인간을 찾아 함께 죽고자 여정을 떠난다. 여정은 실패로 돌아가고 소년은 돌아온다. 그리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 “어른이 된다는 건 주변을 책임질 일이 늘어간다는 것”

 

소노 시온이 <두더지>를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도대체 얼마나 어두운 영화가 나올지 지레 겁부터 먹었다. 소노 시온은 후루야 미노루와 닮은 구석이 많은 당대의 작가다. 후루야 미노루에게서 웃음기를 아예 제거해버리고 피와 배설물을 한 바가지 끼얹으면 소노 시온이 될 것이다. 소노 시온은 <자살 클럽>부터 <기묘한 서커스> <노리코의 식탁>에 이르는 초기작에서 “당신은 당신과 얼마나 관계 맺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반복하며 가정의 붕괴와 책임의식의 부재에 관해 지속적으로 다루어왔다. 그에게 <두더지>는 너무 어울려서 어쩌면 서로 어울리지 말았어야 할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2011년 3월11일, 대지진이 일어났다. 소노 시온은 이미 써두었던 <두더지>의 영화 시나리오를 폐기했다. 그리고 대지진 이후의 폐허를 배경으로 원작 <두더지>의 비전을 새롭게 펼쳐냈다. 원작과 영화의 결정적인 차이는 결말에서 드러난다. 소노 시온은 주인공에게 절룩대고 비틀거리더라도 살아남아 버틸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대지진의 여파로 상처받은 자국민을 향한 메시지였다.


놀랍게도 원작 <두더지>의 컨텍스트는 영화 <두더지>의 방향전환에 의해 더욱 강력한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두더지>의 주인공은 평범한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평범한 어른으로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일원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자신이 너무 치명적인 과오를 저질렀다고 생각해 괴로워한다.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그러나 그가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평범한 어른이란, 바로 그런 과오들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책임이다. 그것을 짊어지지 않고 도망가려는 자들 때문에 상처받았던 주인공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다른 선택을 했어야 했다. 그 선택이 영화 <두더지>에서 평행우주처럼 갈라져 재생된다. 서두를 반복하자면, 인간은 그러니까 어차피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조금씩 죽는 것이다. 그 과거의 크기에 두려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좌절하지도 말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짊어질 수 있는 꼭 그 만큼씩을 가지고 살아나가면, 그것이 평범한 어른이다.

 

후루야 미노루의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인생을 리셋할 수 있는 버튼 이야기다. 그런 게 있다면 누를 거냐는 질문이다. 그는 우리 삶에 인생을 리셋하는 버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역설한다. 아무튼 산다는 건 액정보호필름을 붙이는 일과 비슷한 것이다. 떼어내어 다시 붙이려다가는 못쓰게 된다. 먼지가 들어갔으면 들어간 대로, 기포가 남았으면 남은 대로 결과물을 인내하고 상기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