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허지웅의 영화로 세상읽기

실패담을 경청해야 하는 이유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을 단 두 세 마디로 규정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삶은 크고 작은 모순들로 가득차 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평가받는 사람부터, 끝내 실패한 인생으로 낙인 찍힌 사람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타인의 모순을 잘 참아내지 못한다. 왜 일관되지 않으냐고 타박한다. 상대의 굴곡으로부터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삶은 자연스레 단 두 세 마디 인상비평의 소재가 되기를 거듭한다. 나쁜 놈이거나, 착한 놈이거나.

 

누군가의 삶을 소재로 하는 영화는 그래서 일정 수준의 완성도를 담보하기 어렵다. 필요 이상의 주관이 개입되어 실제 역사의 사실관계와는 별 관련이 없는 픽션이 되기 쉽다. 사실 어려운 일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제대로 조명한다면 이야기는 뒤죽박죽이 되고 캐릭터는 일관되지 않으며 흐름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이 인생이다.

 

그러므로 한 편의 전기영화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태도란 다음의 질문에 스스로 명확한 비전을 갖추는 것일 테다. 그의 눈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를 관찰할 것인가. 요컨대 주인공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를 얼마나 가깝게, 혹은 멀리 둘 것이냐의 문제 말이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성격의 영화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을 감안할 때 올리버 스톤의 <닉슨>은 보기 드물게 공정하고 사려 깊은 전기영화라 할 만하다. 올리버 스톤의 가장 근사한 영화를 꼽으라고 한다면 몇 가지가 거론될 수 있다. 그것은 <플래툰>일 수도 있고 <7월4일생>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JFK>라고 대답할 테다. 그러나 내게는 <닉슨>이야말로 올리버 스톤의 독보적인 걸작이다.

 

사실 <닉슨>은 <JFK>에 비해 평가절하되기 쉬운 영화다. <JFK>는 케네디라는 대중의 오래된 결핍을 보상하는 영화였다. 반면 <닉슨>은 리처드 닉슨 이야기다. 리처드 닉슨. 미국 역사상 가장 실패한 대통령. 부패와 거짓말의 상징. 수많은 텍스트에서 인용되는 악의 화신. 영화가 공개되었던 1995년 당시 대중은 이 작품에 그리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닉슨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켜 미화하고 있다는 비판여론도 많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인간 닉슨을 미화하지 않는다. 한 인간의 영혼이 왜, 어떻게 망가져갔는지, 그의 모순을 가능케 한 끊임없는 자기 합리화가 어떤 맥락에서 작동했던 것인지에 대해 멋대로 판단하거나 비평하지 않고 묵묵히, 끈기있게 관찰하고 드러낼 뿐이다.

 


영화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 전국위원회 도청 사건. 처음에는 별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이미 닉슨의 재선은 거의 확실한 상태였다. 민주당의 맥거번 후보에 비해 무려 19퍼센트나 앞서고 있었다. 백악관의 어느 누구도 이 사건에 자신들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닉슨은 워터게이트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무난히 재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미 모두 알고 있듯,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영화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침몰해가는 닉슨의 모습을 조명한다. 동시에 그의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 시절과 정치입문, 반미활동위원회에서의 반공운동, 아이젠하워 정권에서의 부통령 시절, 1960년 대선에서 케네디에게 불과 10만~40만표 차이로 패배한 후 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케네디의 지원을 받는 민주당 후보에게 참패하면서 정계은퇴를 선언하게 되는 등의 에피소드들이 반복적으로 오고 간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고스란히 드러나는 건 리처드 닉슨이라는 인간의 불안한 영혼이다. 그는 어느 누구도 믿지 못했다. 그에게 진정한 의미의 친구는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닉슨은 하버드 입학 허가를 받아놓고도 돈이 없어 가지 못했다. 훗날 하필 케네디라는 최대의 정적을 만난다. 명문가 출신의 케네디는 성적이 좋지 않았음에도 하버드를 나왔다. 바로 그 케네디에게 간발의 차이로 졌다. TV토론 때문이었다. 케네디의 수려한 외모와 비교되는, 끊임없이 흘려대는 땀과 웅얼거리는 말투로 인해 그는 언론과 민주당으로부터 조롱과 모욕을 당한다. 이로써 그는 평생 ‘아이비리그 출신 부잣집 도련님들’, 그리고 언론에 대한 혐오와 망상에 가까운 피해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이 피해의식은 그를 말 그대로 황폐하게 망가뜨린다.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리고 정적을 감시하고 도청을 하고 거짓말을 하며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이 영화의 압권은 마지막 대목이다. 한밤중이다. 닉슨은 국회의 대통령 탄핵을 목전에 두고 결국 사임을 결심한다. 그는 술에 취해 무릎 꿇고 기도하며 흐느낀다. 왜 여기까지 와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돌이키고 싶지만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인지 그 자신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몸을 추스른 닉슨은 백악관의 어둡고 드넓은 홀을 가로질러 천천히 걸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케네디의 초상화 앞에 당도한다. 닉슨이 나지막이 내뱉는다. “사람들은 당신에게서 이상향을 보는데, 내게서는 그들 자신을 보는군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다. 반면 실패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의 이야기는 보기 드물다. 타인의 불행과 실패를 그저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볼 뿐, 정작 전염될까봐 사유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누군가의 성공담이 제공해줄 수 있는 건 잠시 동안의 쾌감과 환상뿐이다.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고 혹시 모를 성장의 기회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경청해야 하는 것은 성공담이 아니라 굴복하고 실패한 이들의 이야기다.

 

 

허지웅 |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