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허지웅의 영화로 세상읽기

대학살이 가까이 왔다

ㆍ‘노인을 위한…’처럼 무력감을 이야기하는 ‘카운슬러’

 

“당신이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헤매고 있는 그 세상은, 애초 그 실수가 행해진 세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카운슬러>는 냉엄한 영화다. 리들리 스콧은 코맥 매카시의 각본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국내에 이미 출간되어 있는 코맥 매카시의 카운슬러 시나리오와 이 영화가 주는 감흥의 잔재는 놀랍도록 유사하다.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될 본인의 영화를 이토록 완전한 ‘타자’처럼 다룰 수 있는 감독도 드물 것이다.

 

이 영화는 마지막 페이지에 가까워질수록 씨줄과 날줄이 드러나듯 사연과 정체가 선명해지는 종류의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이 영화는 언뜻 서로 별다른 관련이 없는 길고 지루한 대화 시퀀스들이 성기게 모여 있는 결과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말에 이르는 정확한 사연도 동기도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여지가 협소하다.

 

그렇다. <카운슬러>는 친절하지 않은 영화다. 이유가 있다. 이 이야기를 고안해낸 사람들이 단 한 가지 사유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에만 주력하기 때문이다. <카운슬러>는 본연의 질문에만 충실한 일종의 우화다. 그 외의 디테일은 완전히 배제된다. 중요하지 않거나 알 필요가 없다는 식이다. 전통적인 전개 방식에 익숙한 관객들은 어색하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카운슬러>라는 제목의 이 우화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단 한 가지 사유란, 바로 무력감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완전무결한 의미로써의 무력감이다. 분하다거나 아깝다거나 다음번에는 잘해봐야겠다는 여지를 느낄 수 있는 종류의 무력감이 아니다. 그것의 크기도 질감도 성격도, 도무지 어떤 식으로도 가늠하거나 파악할 수 없는 말 그대로의 무력감이다. <카운슬러>가 보여주는 무력감은 그 앞에서 열패감을 드러낼 소박한 사치마저 앗아가버린다.

 

<카운슬러>는 여러 방면에서 작가의 대표작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유사한 지점을 드러낸다. 잠시 그 영화를 떠올려보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사실 명쾌한 영화다. 이 영화는 감당할 수 없는 폭력을 마주한 노인의 뿌리 깊은 한숨을 위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거꾸로 그런 폭력을 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인의 비관을 비난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단지 노인의 지혜로움이라는 것이 결코 세상을 다스릴 수 없음을 조용히 관조해내는 영화다.

 

모든 노인이 지혜로운 건 아니지만, 시간의 녹을 먹은 노인들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울 수 있는 자들임이 틀림없다. 마침내 세계의 원리에 가깝게 가 닿았지만, 결코 그것을 감당해낼 수 없는 노인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늘 은퇴뿐이다. 이 세계에 시간의 개념이 생기고 역사가 기록된 이래 꾸준히 되풀이돼온 노인의 비극이다.

 

시공간을 통틀어 그 어디에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보안관의 마지막 꿈 이야기가 바로 그 반복의 메커니즘을 친절하게 은유한다. 이 원칙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극 종반, 절대악 안톤 시거의 무력한 표정은, 그 역시 언젠가 모든 걸 알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하고 말 것이라는 울림을 가져온다. 그렇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세상이 늘 어리석고 파괴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지혜로운 노인이 늘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원리를, 그 모든 아비규환과 폭력과 살인과 슬픔이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까닭을, 끝내 설명해내고야 만다.

 

 

영화 <카운슬러>의 한 장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앞선 자들의 무력감’에 대해 관조하고 있다면, <카운슬러>는 ‘다가올 파국을 앞둔 우리들의 무력감’에 대해 다루는 영화다. <카운슬러>는 누군가 자신이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세상에 발을 들이밀고 잘못된 선택을 감행했을 때, 그 결과가 어찌 되었든 원래 자신이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찾기 어렵다는 게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다. 매 순간 선택과 동시에 내가 사는 ‘세상’이 탄생되고 있으며, 그러므로 지금의 이 지옥은 빠져나갈 길이 따로 존재하는 이계가 아닌 현실 그 자체라는 것이다.

 

<카운슬러>의 우화적인 감각은 주인공에게 이름을 주지 않고 ‘카운슬러’라는 직업으로 호명함으로써 그의 실수와 실패를 개인적인 사건 안에 가둬두지 않는다는 데서 빛을 발한다.

 

대개 우화의 목적이 그렇듯, <카운슬러>의 이야기 또한 ‘우리’가 대입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주인공이 범하고 있는 실수는 지금 이 순간 바로 우리들도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 물욕이든 자만이든 욕정이든 어떤 단어를 가져다 붙여도 무방하다. 작가는 바로 그런 개인들의 선택과 거기서 파생된 ‘세상들’이 겹치고 쌓여 결코 대비하거나 예상할 수 없는 공공의 파국, 요컨대 이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대학살’이 코앞에 닥쳤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앞에 우리는 철저하게 무력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 두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은 가장 마지막 장면이다. 보안관의 꿈 이야기는 앞서 살아간 아버지들의 무력감이 자신에게 반복되고 있으며 그것이 세상의 어쩔 수 없는 원리임을 설명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와 닮은꼴이되, 그보다 더 순수한 악 그 자체로써의 익명성이 강화된 <카운슬러>의 말키나가 “다가올 대학살은 우리 상상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곧바로 급작스레 이야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암전이 이어졌을 때 우리는 전율할 수밖에 없다. 대학살이 가까워 왔다.

 

 허지웅 |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