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이용재의 건축과 음식 사이

건축 여행이라는 이름의 고행

즐거워야할 여행이 고행으로 바뀌는 건 정말 순식간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 원인은 ‘다시는 못 올지도 몰라’라는 일종의 강박관념, 또는 서글픔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같은 곳을 복수로 여행할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한정된 시간 내에 가능한 많은 것들을 기억, 또는 그 보조수단인 카메라에 담고자 걷기 위해 발을 디딘 길 위를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도시며 거리, 건축물은 어디로 떠나지 않는다. 단지 내가 떠날 뿐이지만 그 모든 서글픔이 거기에서 비롯된다.



지난 10년 동안 이런저런 여행을 다녔다. 일단 그 목록을 대강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 동/서부 종단, 주요 대도시(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보스턴, 샌프란시스코, 댈러스, 시애틀, 샌디에고 등)
유럽: 영국(런던), 프랑스(파리, 릴 등), 이탈리아(로마, 베니스, 밀라노 등), 스위스(취리히, 바젤 등), 독일(베를린, 포츠담), 체코(프라하), 네덜란드(암스테르담, 유트레흐트, 로테르담), 벨기에(브뤼셀), 북유럽 4개국(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동양: 일본(도쿄, 홋카이도, 간사이), 홍콩




언제나 건축물을 보기 위한 여행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공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여행이 결국에는 건축물을 보기 위한 것을 귀결되었는데, 한 번 여행의 성격이 바뀌면 그 다음부터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순례’가 시작된다. 
일단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도시 환경이 특정한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따라서 늘 촉각을 곤두세워야만 한다. 어떻게 보면 삼지사방을 적이 둘러싸고 있으니 늘 경계를 해야 되는 것과 같은 느낌과도 흡사하다.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미리 준비를 해서 지도상으로나마 그 위치를 파악하고 가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여행길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묘령의 처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듯, 계획에 없었는데 마음이 가는 건축물도 있기 마련이다. 이름이 알려진 건물만이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볼품없는 것들이더라도 도시를 채워 아름답게 만드는 데는 아무런 결격 사유가 없다. 

이렇게 계획에 없던 건물과 맞닥뜨리는 것도 쏠쏠한 재미기는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건축 여행이라면 보려고 계획을 잡아놓은 건물만 다 보는 것도 굉장히 벅차다. 
여기에서 말하는 계획은 굉장히 넓은 범위의 고통스러운 사전 준비를 의미한다. 보고 싶은 건물이 있다면 일단 그 위치부터 파악해야만 한다. 요즘은 인터넷도 발달되어 있고, 전문 출판사들도 돈독(!)이 올라 주소가 표기된 안내책자들을 내놓기도 하니 건축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눈과 입에 오르내리는 건물이라면 문자로 된 주소를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서부터 불행의 싹이 튼다. 이 단계에서 주소는 정말 그저 문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문자를 바탕으로 3차원 물질 세상의 단서를 잡기가 때로 절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에 가깝게 느껴지는 상황이 반드시 찾아온다. 




일단 근방에 갈 때까지는 그 동네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절대 알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교통시스템을 이용해서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지, 말로 설명을 들은 것만으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대도시라면 조금 안심이 되지만, 그것도 시내나 번화가일 경우에나 좀 덜하지, 조금이라도 근교라서 교통수단을 여러 번 바꿔 타야 되는 상황이라면 또 다르다. 대도시의 경우도 그 나름의 가로 및 주소 체계가 있어서, 가자마자 바로 몸으로 그 체계를 익혀 건축물만을 보러 다니기는 의외로 쉽지 않다. 
뉴욕의 경우도 그 간단한 한 줄의 주소에 담겨 있는 의미를 파악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나 또한 미국에 살았지만 시골이어서 그런지 뉴욕을 갈 때마다 주소와 지도만으로 익숙하게 건물을 찾는 것 자체에 적어도 한두 시간은 잡아먹곤 했다. 

교통편까지 미리 철저하게 파악해놓았지만 그래도 헤매거나 낯선 곳에 버려진 듯한 불안감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간사이 지방을 여행할 때 욕심이 생겨 근처 기후 현에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을 보려 당일치기로 여행 속의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일본말을 몰라 영어가 가능한 호텔 직원을 붙들고 철저하게 준비를 해 갔지만, 그 직원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마지막 기차가 한 시간에 한 대 올 뿐인, 한 칸짜리 관광 열차라는 사실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아파트는 일본말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절대 찾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고즈넉한 평야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여건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굳이 거기까지 가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여행에서는 10분만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너면 되는 것을, 제대로 물어보지 않고 다른 버스를 타서 한 시간 동안 다른 지방으로 가기도 했다. 물론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찾아간 건물이 미술관이나 박물관과 같은 문화시설인데 가는 날이 임시 휴일이라거나, 아니면 아주 짧은 개장시간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만큼 좌절스러운 일도 또 없다. 아주 제한된 날짜와 시간에만 개장하기 때문에 미리 전화 예약을 해야 되는 경우도 물론 왕왕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경우는 사진이라도 찍어서 남겨두어야 하는데 예상보다 너무나도 빨리 해가 져버릴 때이다. 어느 겨울 미국 서해안 종단을 했는데, 캘리포니아는 한겨울에도 햇살이 비교적 따스했지만 채 다섯 시가 되기도 전에 해가 져 버리고, 어둠은 정말 칠흑같이 찾아왔다. 물론 밤에 더 매력적인 건물도 없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보려고 하던 건물이 개인주택이라면 예외의 가능성은 별로 없다. 

이 정도로 나열한 과정만 거친다고 해도 표적으로 삼은 건물에 다다랐을 때 그 존재가 주는 느낌이 실망스러운 경우가 생긴다. ‘아, 이걸 보려고 여기까지 왔나?’하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빠져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공공건물이 아니기 때문에 속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그 허탈함은 한층 더하다. 사진으로만 건물을 보는 것은 안 보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직접 보는 것보다는 못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그 규모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각적 사고나 공간감에 능한 사람이라면 축척과 함께 찍힌 도면만 보고서라도 머릿 속으로 그 규모나 공간의 느낌을 가늠할 수 있지만,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게 직접 느끼는 공간과 정확하게 궤를 같이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발달된 감각이 그 차이를 최소화해줄 수는 있지만 공간 앞에서 ‘백문이 불여일견’을 깰 장사는 없다. 

더구나 건축물은 단지 ‘보는’ 것만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물은 꼭 직접 보아야 한다. 그 보는 기쁨에 그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이 싹 가신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도 절대 아니다. 

여행은 즐거운 일이지만 이러한 과정들 가운데에서 지적허세가 차지하는 비율이 대체 어느 정도인지 좀 시시콜콜하게 따져보고 싶은 충동이 종종 든다. 건축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연예인을 직접 본 것처럼 사진 속의 ‘작품’을 직접 본 것에 대한 무용담을 앞 다투어 늘어놓곤 한다. 

그렇다, ‘본’ 건축물이라고 이야기했다. 건축물이 '보는' 것인가, 아니면 전체적인 공감각적 경험을 그저 '보았다'고 뭉뚱그려 표현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