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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편지](34) 이문재 - 김자, 정자, 임자, 선생님

이문재 | 시인



미국 동부 폭염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며칠 전 전화하셨을 때 제대로 받지 못해 죄송합니다. 보이스피싱 탓입니다. 앞자리 전화번호가 낯설었습니다. 이튿날 같은 번호로 또 전화가 오길래 한참 뜸을 들이다가 받았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음성인데도 0.1초 사이에 선생님인 줄 알았습니다. 저한테 전화를 걸어 “문재니?”라고 운을 떼는 사람은 지구상에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인천 주안역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사실 많이 놀랐습니다. 길거리에서 마주쳤다면 못 알아 뵈었을 겁니다. 그 사이에 30년이 흘렀다는 사실을 저는 놓치고 있었습니다. 제가 40대 초반으로 접어든 것만 생각했지, 선생님께서 50대 중반으로 진입했다는 ‘현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키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는 것도 약간 충격이었습니다. 


 

이문재 시인 (출처: 경향DB)



비 오는 날이면 노란색 분필을 쓰셨습니다. 물끄러미 창 밖을 내다보시던 뒷모습이 얼마나 단정했는지 모릅니다. 가끔 영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칠판 한 가운데 <사랑의 스잔나>라고 영화 제목을 쓰는 날이면 아이들 눈동자가 빛났습니다. 필체까지 눈에 선합니다. 궁서체 달필이었지요. 개교한 지 3년째 접어드는 시골 중학교. 남녀공학이었습니다. 2학년 때, 젊은 여선생님 세 분이 한꺼번에 부임하셨습니다. 영어, 음악, 국어. 영어와 음악선생님에 견주어 국어 선생님은 시쳇말로 까칠했습니다. 눈매가 차가웠습니다. 목소리도 그랬지만,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조차 빈틈이 없었습니다. 


여름방학 숙제가 생각난 것은 제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였습니다. 황순원 교수님 강의를 들을 때 문득 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선생님께서 내주신 방학 숙제가 저를 문학의 길로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해 여름, 선생님께서 “<소나기>를 다 외워와라”라고 하셨을 때, 아이들은 모두 한숨을 쉬었습니다. 저 혼자 그 숙제를 해갔습니다. 30년 만에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제가 “그때 왜 그런 무지막지한 숙제를 내주셨습니까?”라고 물었는데, 그때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기억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내가 그런 숙제를 냈었니?” 


그 다음 학기에도 사건이 있었습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소설을 각색해 연극 공연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침 그 소설에 결혼식 장면이 나왔습니다. 짓궂은 친구들이 저를 신랑으로 정하고, 신부를 물색했는데, 그때 제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저는 짐짓 그 여학생과 결혼식을 기대했지만, 그 아이는 연습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공부만 잘하는 다른 여학생과 결혼식을 올려야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학교에 들어가서 문학 못지 않게 연극에 심취했던 것도 다 선생님 덕분이었습니다. 


워낙 숫기가 없던 저는 연극부에서 겨우 숨통을 틔울 수 있었습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해서도 문과대 강의실보다는 연극부 연습실에서 죽쳤습니다. 연극이나 영화 쪽으로 진로를 정할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대학로나 충무로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아마 저는 진작에 무너졌을 겁니다.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능력이 저에게는 전무했습니다. 대학 때 정기공연 연출을 맡았다가 절감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다녀가시고 난 뒤, 동창한테서 전해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제가 시인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신다구요. 저로서는 고맙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동창이 그러던데, 선생님께서 그 사이 시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해오셨다구요. 깜짝 놀랐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 쓰는 사람보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크고 높아 보입니다. 저는 아직도 시와 불화합니다. 시에 견주면 제 삶이 너무 작습니다. 지난 번 통화에서 그러셨지요. “얼마 전에 김용택 시인이 다녀가셨는데, 너는 언제 오는 거니?” 글쎄요. “누가 초청을 해줘야 말이지요”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습니다. 가을에 제 다섯 번째 시집이 나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사이 시와 조금 더 친해져 있겠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선생님 성함을 적어봅니다. 김자, 정자, 임자. 내내 평화로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