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 마지막 편지

[내 인생 마지막 편지](35) 유정아 - 내가 살던 동네 화곡동

나의 어린 시절을 추억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 화곡동이다. 담이 없던 화곡동 마당에 혼자 앉아 털바지 안에 인형 다리를 넣어 아이처럼 업고 벽돌을 빻으며 소꿉놀이를 했다. 진짜 엄마가 되었을 땐 정작 아이를 업고 그렇게 밥하고 빨래하고 “여보, 밥 드세요” 같은 짓을 많이 하지 않았건만, 어릴 때 나는 앙큼하게도 그러고 놀았다. 담이 생기고 옆집에 정수라는 아이가 살게 되었을 때 그 아이와 난 인생의 첫 친구가 되었다. 큼지막한 미끄럼틀이 있는 길 건너의 놀이터에도 함께 다녔고 우리집 안방 장롱의 거울 앞에 서서 사진도 같이 찍었다. 어느 해 비가 많이 와서 개천이 넘쳤던 날엔 흐르는 물에 조리 한 짝을 잃어버려 울며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엄마가 시집 가 처음 살다가 나를 낳았던 집은 갈현동이라고 했다. 시부모 돌아가신 시댁 형제들, 게다가 장가 안 든 아주버님까지 함께 사는 집이었는데, 심통이 좀 있었던 큰아버지는 내가 통통거리며 다니는 게 시끄럽다며 발끝으로 걸어다니라고 했다고 한다(다행이다, 그 서러운 장면이 기억에 없어서). 그러다가 처음 세 식구 단출하게 나가 살게 되었으니 엄마는 오죽이나 좋았을까. 사진 속 세 식구의 얼굴은 저마다 행복하다. 자고 일어나 뻗친 머리를 다스리기 위해 비니 같은 모자를 쓴 젊은 아빠는 인형을 등에 업은 첫딸의 볼에 입을 맞추며 ‘어꾸, 그랬쪄?’라는 표정이다. 집안일을 도와주던 할머니가 봉숭아물을 들여준다며 어르고 꾀어 억지로 할머니 방에서 몇 차례 자고 나니 동생이 생겼다. 주인공이 된 동생 옆 한 귀퉁이에 불쌍하게 앉아 사진을 찍은 것도 화곡동 안방이며, 릿츠 크래커를 상 한쪽에 얹은 동생의 돌상을 차린 곳도 화곡동 마루였다. 동생이 태어나던 해 여름에 산 선풍기는 아직도 여름이면 친정에서 돌고 있다. 


동생이 태어나 부산스러워지기 전, 담도 없던 넓은 세상에 나 혼자였을 때였던 것 같다. 실제의 기억과 사진 속 기억의 혼재일 수도 있는데, 두 돌이 지나던 즈음 겨울 마당에서 벽돌을 빻다가 올려다본 하늘. 공항과 가까워 비행기가 자주 다녀서였을까. 인형아기를 업은 꼬맹이 주부가 가사일을 하느라 쪼그리고 앉았다가 일어날 때는 등을 두드리며 하늘을 보아서였을까. 그 하늘의 농도와 높이와 이유를 알 수 없던 슬픔이 기억나는 건 참 묘한 일이다. 낮잠을 자다가 깨었을 때 느끼는 슬픔은 뭉근하고 질펀한 것이었다면, 그 하늘에서 느껴진 슬픔은 아찔하고 탱탱했다. 


이후 서울의 동서남북으로 이사를 많이 다녔다. 홍익동, 역촌동, 한강을 건너 반포, 방배동. 그리고 결혼 후 한강을 다시 건너 청운동, 부암동, 평창동. 그러다가 또 사정이 생겨 신반포를 찍고 바로 강 건너 강변의 이촌동을 거쳐, 부암동. 그리고는 지금 효자동에 살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강남에 가서는, “이런 데는 사람이 어디 살아요?”라고 묻는, ‘강북사람’이 다 되었다. 그 사이사이, 아이였을 때, 사춘기였을 때, 어른이 되고 나서도, 그 계절 겨울과 상관없이 하늘을 보면 어린 시절 화곡동에서 본 하늘이 생각날 때가 있다. 쨍한 여름 아이들의 함성과 물소리 가득한 수영장 탈의실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때, 여고 시절 가을운동회를 가느라 가뿐한 기분으로 집을 나섰을 때, 평창동 살던 때 집 아래 카페에 앉아서 창공을 올려다 보았을 때, 그리고 추석을 앞둔 즈음의 알싸한 공기 속에서도, 나는 기시감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그 어린 날의 슬픔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것은 흑인영가 ‘Sometimes I feel like a motherless child’의 가사처럼 ‘엄마 없는 아이’가 되어버린 듯한 적막감과 비슷한 감정이다. 가끔 다리가 휘청거리기까지 하는 그럴 때 난 거의 ‘아, 그날의 하늘이야’라며, 하늘에 도장을 찍어버린다. 소아과에서 예방주사 맞듯 인생의 어쩔 도리 없는 비애를 하늘의 기억으로 치유하려는 걸까. 삶은 그런 거야, 다 누구든 어느 정도 아프고 힘든 거야, 혼자 견뎌내야 하는 거야, 라고 자위할 수 있도록 말이다. 두 돌이면 한창 예방주사 맞을 시기이기도 한 것이다.


예방주사를 맞아도 앓을 것은 앓고 지나가듯이 많은 아픈 경험들을 지났다. 나도 그만큼 남들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삶은 그저 안온한 소꿉장난이 아니란 것을 엄중하게 내려다보던 하늘은 내게 말해 주었다. 산다는 건 하나씩 이뤄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 발에 신은 신발을 잃고, 엄마를 잃듯이 하나씩 잃어가는 것이기도 하다고, 어릴 적 나의 동네여, 당신은 그걸 내게 말해 준 것이리라. 


사람 사는 마을이여, 우리를 품고 있는 동네여. 누구나 엄마를 잃는 우리를, 내 아이들을 어여삐 여기시고, 당신들 품에 깊이 뿌리 내려 살 수 있게 좀 도와주시오. 꼭 새 길을 내는 것만이, 새 길을 걷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겠나이다. 가끔 고개 들어 하늘을 보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