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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편지](37) 서하진 - J에게

서하진 소설가



내인생 마지막 편지, 라는 꼭지의 청탁을 받았을 때 선뜻 내키지 않았어. 생을 마감하는 마당에 남기는 편지라니, 그간 써 젖힌 글 나부랭이로도 차고 넘치지 않는가 말이야. 마지막이라는데 누굴 원망하는 건 좀 그렇고 감사를 할라치면 열 손가락으로는 모자랄 터이니 말이지. 


너를 떠올린 건 나로서도 뜻밖이야. 우리의 인연은 고작 이년 남짓, 친구, 연인, 동료… 그 어떤 이름으로도 부르기 마땅찮은 사이였으니. 그럼에도 나는 결국 네게 편지를 쓰고 있어. 오래전 어느 날. 그날 너는 잿빛 셔츠를 입고 있었어. 셔츠의 빛과 닮은 너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지. 잘 지냈지, 잘 있었어, 그런 안부가 오가고 너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끝내 아무런 말없이 떠났어. 여름날이었어. 벤치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가던 너의 등에 사정없이 쏟아지던 햇살이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 


 너를 생각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건 강렬한 카레냄새야. 안양 교도소 가는 길, 버스 안에서 졸다 깨다 반복하며 길이 다할 즈음 거대한 카레공장이 있었거든. 그 길을 지나 면회신청을 하고 나는 철창을 사이에 두고 너와 마주 앉았지. 푸른 수의를 입은 너는 옷처럼 푸르스름한 안색으로도 내게 웃어 보였어. 필요한 것은 없나, 내가 물으면 너는 몇 권인가 책 제목을 내게 일러주었지. 한 달에 한번, 고작 반나절에 지나지 않은 그 일이 한 달의 나머지를 온통 지배했다면 너는 믿을까. 


소설가 서하진(출처: 경향DB)


그 이전 봄, 너와 나, 그리고 다른 두 명의 학우들이 책을 읽고 토론하고자 모임을 꾸렸지만, 뭐, 우리들 사이에 엄청난 향학열이 있다거나 그랬던 것 같지는 않아. 당시 유행이었잖아, 스터디 그룹이라는 거.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주어진 일은 열심히 하는 체질이니 아마도 나는 꼬박꼬박 책을 읽고 요약을 하고 무어라 잘난 척하며 발제를 하고… 그랬을 테지. 너 역시 별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했어. 너는 좀 껄렁한 타입이었잖아. 치밀하거나 추진력 있거나 어느 쪽도 아니었다, 고 나는 믿고 있었지. 때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조직에 대해 네가 얘기해도 나는 진심으로 그런 이야기를 믿지는 않았어. 우리들 사이에 떠돌던 열패감, 그건 80년대의 모든 청년들에게 공기처럼 익숙한 것이었어. 다만 나는 그랬던 것 같아. 네가 좀 들떠있구나, 무언가 이 친구를 휘두르고 있구나, 어떤 것에 사로잡혀 있구나…. 그리고 어느 날 너는 사라졌지. 갑자기, 거짓말처럼.


네가 위반했던 긴급조치, 그 위반을 위해 네가 어떤 일을 했는지 사실 나는 지금도 자세히 알지 못해. 이랬다더라, 아니, 저랬다더라, 풍문으로 들은 것뿐. 너를 면회하고 원하는 책을 운반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선배의 부탁을 수락했던 건 부채감이었어. 누구는 감옥엘 갔는데 아무 일 없다는 듯 학교엘 다니는 그 일상이 무섭고 두려웠지. 스스로 파렴치하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운 날들이었으니. 


삼년형을 받았던 너는 일년 반을 복역하고 풀려났지. 광복절 특사. 영화제목이잖아. 웃기는 영화. 그 소식을 나는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 들었어. 휴대전화가 있던 시절이 아닌데, 네가 뉴스에 나올 정도의 거물급 수형자도 아니었는데 어째서 그랬을까. 모모한 인사들이 특별 사면되었다, 는 뉴스를 듣고 서울에 와서야 확인했을 거라 여겨지지만 기억은 집요하게 기차 안을 고집하는 거야. 철로 위를 구르는 바퀴소리, 차창을 스치는 여름 오후의 나른한 풍경, 오싹하던 느낌…. 그런 것들이 자연스레 떠올라. 이상한 일이야.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야. 너는 어찌 홀로 그 길을 갔을까. 어쩌면 그토록 용감했을까. 너를 버려두고 우리는 어떻게 그 많은 날들을 태연히 살아냈을까. 나는 왜 그 여름 오후 너에게 묻지 못했을까. 왜 나를 찾아왔는지, 철창을 벗어난 네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책이 아니고, 사식이 아닌 그 무엇이 필요했던 것인지….


할 말을 감추고, 그처럼 외로운 얼굴로 어디로 갔을까, 너는. 그리고 지금 너는 어디에 있을까…. 내 많은 날들이, 아무렇지 않게 살아온 날들이 실은 J, 너에게 빚진 거라고 말하면 너에게 위안이 될까. 어쩌면 오히려 미안한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