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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편지](38) 손숙 - 나의 대통령님께!

손숙 | 연극배우




그 무덥던 8월의 어느날 대통령님은 떠나셨습니다. 병원에 계시던 내내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때 공연이 임박해서 정신없이 연습 중이었는데 무대에 있던 제게 방금 대통령님이 서거하셨다고 누군가가 알려주었고 저는 팔다리 힘이 풀려 스르르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은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그냥 머릿속이 하얗기만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온몸과 마음이 무너져 내린 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존경하던 노 대통령님을 보내는 것 하고는 좀 다른 것이었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두 분의 아버님이 계십니다.


제 친아버님은 워낙 오랜 세월 떨어져 살아서 그냥 절 낳아주신 분 정도일 뿐, 육친의 정이라든가 이런 걸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평생 절 한번 안아주신 적도 없고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 적도 없고 제 인생 안에 단 한번도 들어오신 적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제 마음속 첫번째 아버님은 벌써 오래 전에 돌아가신 이해랑 선생님이십니다. 저를 배우로 만들어 주셨고 배우로 인정해 주셨으며 제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제 의지간이 돼 주신 분이셨습니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고 세상물정에 어둡기만 했던 저는 우왕좌왕 어쩔줄을 몰라했습니다. 연습장에서도 안정을 못하고 늘 불안에 떨고 세상과 사람에 대한 증오심에 가득차 있던 저를 늘 거두어 주셨습니다. 연습을 끝낸 저녁이면 후배들과 만나시는 자리건 친구들과 만나시는 자리건 늘 저를 불러 옆에 앉혀 놓으셨습니다. 제가 마음이 안 놓이셨던 거죠. 저는 선생님 옆자리에 앉아 선생님이 겪어오셨던 파란만장한 선생님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그 힘든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그냥 든든하고 편안한 아버님 같은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마음 붙일 곳 없을 때 저는 대통령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세상은 온통 삼엄했고 늘 대통령님은 감옥 아니면 집에서도 감시가 엄청나서 그 근처에 가는 것조차도 무서웠던 시절 어느 용감한 연극 선배 한분이 문안인사를 갔었는데 제 안부를 물으셨다고 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듣고 저는 너무 죄송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었습니다. 


그 후, 저는 제 공연 때 조심스럽게 초대장을 보내드렸고 대통령님이 제 공연을 보러 오셨습니다. 의자도 불편한 작은 소극장에도 오셨고 선거철 엄청 바쁜 와중에라도 꼭 공연장에 오셔서 박수를 쳐주셨고 전문가 못지 않은 연극평도 해주셨고 우리 배우들에게 저녁도 사 주셨습니다. 


그러나 겁 많고 소심했던 저는 대통령님의 작은 부탁도 들어드리지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대통령 후보가 되시고 라디오 지지 연설을 부탁하셨을 때도 저는 그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남편의 사업 실패로 빚을 갚아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일을 할 수밖에 없는데 지지 연설을 하고 나면 일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 부탁을 들어드릴 수가 없다고 제가 말씀드리니까 깜짝 놀라셨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을 겪고 있는 줄 전혀 몰랐다고 하시면서.


그리고 얼마 후 제 공연을 보러 오셨고 그날 연극이 끝난 후 저를 자동차에 태우셨어요. 댁 응접실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시고 안방으로 들어가셨고 곧 사모님이 봉투 하나를 들고 나오셨지요.


“얼굴이 너무 못 쓰게 됐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이거 가지고 가서 꼭 보약 한첩 지어 먹고 몸 추스르라고 하시네요.”


고 김대중 전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연극 <가을소나타>의 배우 손숙씨와 환담하고 있다. (출처 :경향DB)


그날 저녁 저는 동교동 대통령댁 대문을 나서면서 엉엉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제 마음 속에 아버님으로 모셨습니다. 대통령이 되시고 온갖 일을 다 겪으시고 자주 뵐 수는 없었지만 저는 힘들고 기운이 빠질 때마다 ‘대통령님이 계시니까’ 하고 마음을 추슬렀습니다. 


제가 환경부 장관이 되고 러시아에 가서 공연을 하고 무대에서 금일봉을 받은 게 엄청난 문제가 되고 장관을 그만두던 날, 제게 전화하셨죠. “연극 잘하고 있는 사람 데려다가 날벼락 맞게 해서 미안해요”라고. 


저는 마음 속으로 ‘아닙니다. 그 말씀으로 됐습니다’라고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 임기가 끝나시고 동교동에 인사하러 갔는데 집안은 너무 적막하고 두 내외분이 불도 제대로 안켠 어둑한 거실에 앉아 계신 것을 보고 가슴이 무너져 내려 앉았습니다. 


이제 좀 마음 편하게 맛있는 것 잡수러도 다니시고 제 공연에도 다시 꼭 모시고 싶었는데 당신 운명은 끝까지 편안하신 운명은 아니셨던가 봅니다. 


그곳에서는 편안하신지요?


이제 8월이 옵니다. 대통령님 떠나시던 날 그 무덥던 8월을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영원한 제 마음속의 대통령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