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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편지](39) 신춘수 - 나의 벗 라만차의 기사에게

신춘수 | 오디뮤지컬컴퍼니 대표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작가는 상상력으로 글을 쓰지 않고 단지 기억으로 글을 쓴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난 기억의 파편을 모아야 할 뿐만 아니라 상상력과 감성을 모아 당신에게 글을 써야 합니다. 우리는 시공간을 넘어 만났기 때문이지요.


우선 우리가 어떻게 만났을까 생각해 봅니다. 중학교 1학년 겨울에 당신을 만납니다. 순식간에 당신에게 빠져 함께 여행을 떠났지요. 어린 나는 당신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풍차를 향해 돌진하고, 모험에 뛰어들고 꿈을 향해 가는 모습이 너무나 멋졌지요.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주 가끔 당신을 생각하곤 했지만, 나의 청춘은 온갖 세상 관심사로 향해 갔고, 정신 없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 빠져 허우적거렸기 때문이죠. 이런 젊은 시절의 방황을 끝내고, 뮤지컬 프로듀서로서 일할 때 어느 날 난 당신과 해후합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운명이었을 것입니다. 2005년 당신을 만나기 전에 엄청난 서곡이 있었지요. 


 


2004년 여름, 어느 연습실에서 젊은 프로듀서와 배우, 스태프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엄청난 집중과 에너지로 작품을 만들어갑니다. 작품이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 한번도 보지 못했던 풍경이 공연장에서 펼쳐졌지요. 관객은 열광하였고, 그들이 보내준 사랑은 엄청난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하나의 신드롬을 만들었지요. 이 작품이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였습니다.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고, 새로운 물결이 만들어졌었지요. 이 작품으로 나는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젊은 뮤지컬 프로듀서로서 인정받았지요. 이후 자신감을 갖고 미친 듯이 일했습니다. 빨리 달리고 싶었고, 세상을 빨리 갖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욕심에 몸이 망가져 병원에 가게 됩니다. 이미 일하면서 오랜 지병과 투병하며 견디고 있었는데, 결국 수술대에 올라 심장판막증 수술을 합니다. 하지만 제대로 요양을 못하고 일을 하여 그해 겨울 건강을 회복 못하고 쓰러집니다. 죽음이 눈앞까지 찾아왔었지요. 병석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앞만 보고 폭주기관차처럼 달려 온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내가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행복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나? 역시 뮤지컬이었고, 뮤지컬작업을 통해 관객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면 그 이상이 없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정말 사랑하는 작품을 하자고 결심합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은 당신이 주인공인 <맨 오브 라만차>였습니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출처: 경향DB)


10대 때 처음 당신을 만났으니 우리 사이에도 제법 세월이 흘렀네요. 2003년에 다시 볼 수 있었는데 당신과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죠. 이유는 진실의 적인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2005년 다시 당신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당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요. 깊어가는 당신에 대한 사랑 때문인지 작품을 할수록 사람들은 날 돈키호테라고 부릅니다. 하고 싶은 작품을 거침없이 제작하고, 뮤지컬 시장보다 앞서가는 행보 탓에 기사소설에 심취해 스스로 편력의 길을 나선 무모한 당신과 닮았다고 합니다. 진정 내가 당신을 닮았을까요? 아니면 당신을 닮고 싶은 흉내쟁이일까요? 잘 모르겠어요. 분명한 것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순간 당신이 살고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습니다. 빗소리와 함께 묻어 오는 바람이 더욱 나를 부추깁니다. 스페인의 라만차(La Mancha)는 지금 어떤가요? 비가 오나요? 빛나는 오후인가요? 당신이 기사가 되어 잘못 돌아가는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돈키호테가 되어 로시난테를 타고 산초 판사와 편력의 길을 나선 라만차라는 곳에 가보고 싶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고 마을 언덕 위에 우뚝 솟은 풍차가 있겠죠. 


이베리아 반도의 독특한 풍광을 이고 있는 라만차의 캄포 데 크리프타나는 낯선 이방인들이 시간이 멈춘 듯이 당신을 찾아 여행을 오고 있지요. 아마도 그 작은 도시에서 푸른 하늘과 드넓은 대지를 보면서 당신의 꿈과 이상을 노래하며 키호티즘을 발견하겠죠.


나도 낯선 이방인 중에 한 명이고 싶습니다. 당신이 풍차와 마법사를 무찌르는 용감한 모습을 보고, 당신의 연인 둘시네아 공주가 살던 흰 벽의 거리 엘 토보소(El Toboso)도 함께 거닐고 싶습니다. 물론 당신이 얘기해주는 온갖 무용담을 들으면서요.


당신의 이야기는 항상 나를 매료시킵니다. 


당신의 노래가 들립니다. “내가 영광의 이 길을 진실로 따라가면 죽음이 나를 덮쳐와도 평화롭게 되리…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가네 저 별을 향하여.”


벗이여. 언제나 내 곁에서 힘이 되어 주세요.


P.S 오늘따라 당신이 그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