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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편지](41) 마광수 - 너를 사랑해, 미치도록

마광수 | 연세대 교수



오늘은 수요일.


어제 예기치 않게 술을 많이 마시게 되어 꾸물꾸물하다 보니 학교에 안 가고 그냥 집에 있게 되었다. 한여름의 수요일이라 에어컨을 틀어놓고 있는데도 덥기만 하고, 왠지 마음이 답답하고 외로워진다. 요즘이 한창 휴가철이라서 손에 손을 맞잡고 산으로 바다로 여행을 떠나는 젊은 연인들 쌍쌍이 그저 부럽기만 하다. 그러다 보니 집에 틀어박혀 책만 읽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해 보이기도 하고. 하긴 학교 연구실에 나가 있어봤자 고독감이 덜해질 리 없겠지. 학생들이 국내외로 여행을 떠나 캠퍼스 안이 텅 비어 있을 테니까. 


 

LK:사진 속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마광수 교수 (출처: 경향DB)



지금은 저녁 8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화면 속에 나타나는 것은 온통 너의 얼굴뿐이다. 왜 이리 우리는 마음껏 뭉칠 수 없는 걸까?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그래도 너를 만나게라도 된 것이 다시 한번 기적같이 여겨지고 새롭게 정열이 용솟음쳐 온다.


오늘 하루 종일 이 책 저 책 닥치는 대로 조금씩 읽어보다가, 옛날에 읽어서 다 잊어버린 전혜린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와 일기 및 서한집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두 권을 찬찬히 정독했다. 고독에 찌들고 가정생활의 부조화에 찌들고 삭막한 시대상황에 찌들어 괴로워했던, 그래서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그 여자의 시름이 내 시름처럼 가슴에 와닿았다.


나도 1992년 말에 일어난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 때 감옥에서 풀려나와 학교에서도 잘리고 항소심과 상고심을 힘겹게 해나가면서, 문화적으로 척박하기 그지없는 한국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에 절망해 두 번이나 자살 시도를 해본 적이 있다.


또 2000년 가까스로 연세대 교수로 복직한 지 2년 만에 국문학과 동료교수들의 집단따돌림에 의해 ‘교수 재임용 탈락’의 위기를 겪게 되자 심한 외상성 우울증에 걸려 자살 시도를 두 번이나 해본 적이 있다.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자살 시도 모두 다 미수에 그쳐, 지금껏 구차한 목숨을 지탱해오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전혜린의 고독한 자살이 내겐 남의 일같이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시대는 달라도 그녀나 나나 ‘한국에 태어난 죄’로 인해 끊임없이 갈등하는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 업보라면 업보가, 너무나 무거운 멍에처럼 생각되는 것이었다.


이거 내 푸념과 팔자타령이 너무나 길었구나. 미안해. 전혜린 때문에 그렇게 됐어.


너는 나를 지금 보고 싶어 하고 있을까? 모르겠어. 사랑에 빠지게 되면 언제나 이쪽만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니까. 


너를 사랑해. 아주아주 미치도록. 지금 난 너 때문에 살아가는 것 같아. 하지만 헤어질 때마다 굳어 있는 네 표정을 보면 죽고 싶어져. 실컷 키스라도 하고 나서 (그 다음엔 물론 짙은 페팅도 왕창 하고) 헤어지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안되더구나. 너무 뜸하게 만나니까 기다리다가 진이 다 빠져나가 버리는 것 같다. 


너는 어떠니? 너무 남자가 많아서 나를 만나는 게 피곤하기만 하니? 네가 도와주면 나도 꽤 멋지고 로맨틱한 글을 많이 쓸 수 있을 것 같다. 정말이야. 나를 더 깊이 사랑해줘.


문득 달력을 보니 얼마 안 있어 입추로구나. 가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더 섹시하고 소프트해진 네가 내 곁에서 미소짓고 있는 것 같다. 가을은 고독과 조락(凋落)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네가 있는 한 나에게 가을은 그런 계절이 아니야. 가을은 쿨한 사랑의 계절이야. 부디 나를 사랑해보려고 노력해줘. 나이 차이 같은 거 따지지 말고. 


너의 운명과 나의 운명, 그리고 우리의 기이한 만남을 축복하고 싶다. -광마(狂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