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들판에도 봄·봄·봄

들에 가본 지 언제인지 기억도 없던 차에 모처럼 나선 길이다. 멀리 하동 땅이다. 고속도로가 뚫려 대여섯 시간 걸리던 길이 훨씬 짧아졌다. 얼마 전에 내린 비로 섬진강은 봄답지 않게 수량이 좋고 넉넉하게 흐른다. 들은 여유롭고 살져 있다. 산도 거친 겨울을 벗고 푸른 옷으로 막 갈아입는다. 그늘도 있다. 벚꽃이 비바람에 떨어져 제 풍취를 일찍 잃었다. 지역 사람들은 만만치 않은 손해를 입게 되었다고 한숨이다. 아쉬운 일이다.

그래도 선한 바람 불고, 얼굴에 닿는 부드러운 햇살이 봄을 알린다. 만물이 제각기 다투어 힘을 낸다. 종 번식의 임무를 띤 당대의 싹들이다. 지리산 언저리 산으로 오른다. 고사리가 이미 지천으로 어린 옹주먹을 매달고 불쑥 솟아 있다. 취와 쑥이 보인다. 어린 쑥의 향을 생각하니, 어머니가 그립다. 쌀가루도 귀해서 밀가루로 쑥버무리를 해주셨다. 그 냄새를 잊지 못해 봄만 되면 먹고자 하지만, 어디에도 없다. 쑥이 변한 게 아니라 내가 변한 것일 텐데. 어린 쑥을 조심스레 뜯었다.

이탈리아에서 재미있는 파스타를 많이 보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걸 들라면 단연 쑥국수다. 이름을 그렇게 붙이고 보니, 우리 음식 같다. 스파게티를 만들되 쑥을 넣어 색깔과 향을 낸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고사리는 아무도 먹지 않아 우리 교민 차지인데, 쑥은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그들도 봄에 쑥을 캤다. 어린잎이라야 향이 좋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거둔 쑥을 살짝 데친 후 올리브기름에 넣어 곱게 갈아서 밀가루와 반죽한다. 오래 치대서 끈기를 주고 국수를 뽑았다. 스파게티라고 부르면 다른 나라 요리가 되겠지만, 영락없는 쑥국수다. 그 향긋하고 아릿하고 은근하며 유혹적인 향이 또 어디 있으랴. 한국에서도 그 국수를 해먹고 싶었는데, 좋은 쑥을 구하지 못했으나 기어이 임자를 만난 것 같다.


하동 악양 들판에서 막 태어난 어린 쑥 한 줌으로 국수, 아니 스파게티를 빚을 수 있으리라. 쑥으로 빚은 국수에 쑥으로 만든 소스를 끼얹으리라. 봄을 만끽하리라. 자연이 철마다 순환되는 건 나이가 좀 들어서 그 실체를 몸으로 느끼게 된다. 대체로 먹는 일이 그 한 방편인데, 겨울 끝에는 냉이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냉잇국으로 혀를 위로했다. 냉이가 떠날 즈음 고맙게도 쑥이 제 차례를 알고 나와서 이 봄의 입맛을 지켜주는 셈이다. 고사리를 꺾어 삶아 말리는 일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동에는 머잖아 청매를 수확할 거라고 한다. 고단한 시절들, 입맛을 잃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 밥상에 내가 한 손 보탤 수 있기를. 벚꽃이 속절없이 져버렸다고 슬퍼했던 마음, 저쪽에서 부끄러움이 일어난다. 이렇게 환장하게 좋은 계절에 사라졌던 아이들을 다시 생각한다. 소설가 박민규의 말처럼 살아남은 자들이 끝내 슬픔과 분노로 견인한 봄인 것이니.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천의 맛  (0) 2015.04.23
그리운 막국수의 ‘품격’  (0) 2015.04.16
살코기보다 간  (0) 2015.04.02
직장인의 점심시간  (0) 2015.03.26
옥수수 왕국  (0) 2015.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