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문지혁의 미니픽션

[미니픽션] 핏자국

 


남자가 카페 문을 연다.  
    
여자는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무관심한 척 하고는 있지만 유리에 비친 그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남자는 안다. 그 역시 여자가 앉아있는 곳을 알고 있지만 카페 안을 여러 번 둘러보다가, 어느 순간 우연히 그녀를 발견했다는 듯 가서 천천히 그녀 앞에 앉는다.


“오래 기다렸어?”


여자는 반갑지만 웃지 않는다. 대신,



“지금 몇 시야?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라고 쏘아붙인다.

남자는,


“미안.”



이라고 짧게만 대답한다. 그리고는 둘 사이에 긴 침묵이 흐른다.



“안되겠다.”


침묵을 깬 것은 여자다. 그녀의 표정에는 어떤 결연함이 깃들어 있다.


“우리, 여기까지만 하자.”



“뭐?”



“그만 두자고. 사람 말 못 알아들어? 헤어지잔 말야.”



남자는 여자를 쳐다본다. 전체적으로 무심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피면 희미한 분노가 엿보이는 눈빛. 그는 들릴락 말락 하게 한숨을 한번 쉬고, 옆으로 메고 있던 가방 속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놓는다.



“니 소원대로 해준다. 진짜 끝이야, 이번엔.”



남자는 자신의 자리에 마지막 한 마디를 대신 앉혀놓고, 일어나 카페를 빠져나간다. 여자는 남자가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창밖을, 아니 유리에 비친 남자의 마지막 뒷모습을 쫓는다. 눈에 뭐가 들어갔는지 자꾸만 눈을 깜박거린다.


한참 후에 여자는 상자를 연다. 상자 안에는 이제껏 그녀가 그에게 선물했던 물건들이 담겨있다. 편지와 사진, 엽서, 면도기, 아이팟, 전자사전, 속옷, 지갑, 만년필, 키홀더…… 그중엔 선물한 기억조차 희미한 물건도 있다. 그녀는 그중 면도기를 꺼내 면도날 하나를 분리한다. 오중면도날을 모두 분리하니 면도날 다섯 개가 모인다. 그 다섯 개를 왼손에 가지런히 쥐고, 여자는 다시 창밖을 바라본다. 진짜 끝이야, 이번엔. 남자의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오른 손목 위에서 힘차게 내리긋는다.
 

핏자국을 본다.



탁자 위로 쓰러진 그녀는 실려 가고 놀란 종업원은 서둘러 탁자를 닦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끝내 저 조그만 핏자국만큼은 지워지지 않고 살아남는다. 그녀는 살았을까, 혹 죽었을까. 남자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들은 왜 헤어졌을까. 아니, 아니, 그런 그들이 있기는 있었을까. 나는 지금 앉은 테이블 끝에 묻어있는 핏자국이 혹 그래서 생긴 것은 아닐까 상상해본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알 수 없는 핏자국을 바로 그 핏자국으로 만드는 일. 노트북을 덮으며 나는 스타벅스 로고가 선명한 티슈로 핏자국을 닦아낸다. 누군가 유리창에 비친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