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문지혁의 미니픽션

[미니픽션] 7초만 더





OFF

잘 타지 않는 Q라인을 탄 것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지난 이주일간 연락이 없던 그녀에게 어젯밤 텍스트가 온 것이다.

 
See you tomorrow

6pm@Union Square

 

이모티콘 없는 짧은 문자는 갑작스러웠던 2주간의 공백만큼이나 낯설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그녀는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었다. 그 시간이 그녀에게는 2주였던 것일까.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승낙이든 거절이든, 나는 빨리 아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다. 오후 5시, 유니온 스퀘어로 가는 노란색 Q라인을 기다린다.

 

ON

지하철이 도착하고 문이 열린다. 들고 있던 아이팟의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모드는 랜덤 플레이.

  

PLAY 0:01

지하철에 들어서자 정면에 앉아있던 흑인 사내가 내리며 자리가 생긴다.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나는 그 자리에 앉는다. 자리에 앉자 어디선가 희미하게 기분 나쁜 냄새가 난다. 사내는 홈리스였던 걸까? 주위를 둘러보지만 별다른 점은 없다. 나는 인간의 후각이 금세 둔감해지는 감각기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조금만 더 참고 있기로 한다. 이어폰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PLAY 0:17

액정에 나타난 곡명을 확인한다. <추억과 함께 영원히 둘로 남는다>. 아티스트는 이루마. 나는 길고 어딘지 슬픈 제목을 가만히 중얼거려본다. 추억과 함께, 영원히, 둘로 남는다……

 

PLAY 1:21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나를 만나자고 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마도 그건 그녀의 마음이 어느 한 쪽으로 정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그녀가 예스, 라고 말할 경우와 노, 라고 말할 경우 모두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노, 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를 궁리한다. 그녀의 잘못은 없다. 이별이 그렇듯, 사랑 역시 이기적인 두 욕구 사이의 충돌이니까.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그녀도 나를 좋아해야할 이유는 없다. 내가 싫어졌다고 해서 그녀도 내가 싫어져야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은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타이밍이 결정한다.

  

PLAY 2:11

열차가 덜컹거린다. 반대편에 앉은 각양각색의 얼굴들 사이로 어둠 속에 비친 내 얼굴이 건너다보인다. 피곤하고 지친 듯한 얼굴. 나는 미국시 시간에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 에즈라 파운드의 짧은 시(詩)를 떠올린다: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인파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얼굴들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미국 태생인 그가 파리의 어느 지하철역에서 썼다는 그 시의 의미를, 나는 한국을 떠난 지 한참이 지나서야 뉴욕의 노란색 Q라인 안에서 깨닫는다. 검고 조용한 창에 비친 얼굴은 정말로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을 닮았다. 말하자면, 모든 것의 의미는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고 난 후에야 밝혀지는 것이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과거의 비밀처럼.

 

PLAY 2:50

앉아 있는 줄의 맨 끝 쪽 히스패닉 사내가 일어선다. 50대쯤 되었을까? 걸음을 비틀거리는 것이 취한 듯하다.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아직 술을 마실 시간은 아닌데, 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린다. 이글거리듯 붉게 충혈된 사내의 두 눈이 마음에 남는다.

  

PLAY 3:01

갑자기 무릎 위로 물 같은 것이 뿌려진다. 액체가 튄 방향을 바라보니 아까 일어났던 그 사내다. 그는 어딘가에서 가져온 커다란 물통을 들고 무언가를 뿌려대고 있다. 이게 뭐지?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어린 시절의 몇몇 장면들이 오래된 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열려진 조립식 상자, 에나멜, 붓, 그리고 미제 땅콩 케이스 안에 담아두었던 냄새나는 물…… 그래, 이건 그 물이다. 그 물의 진짜 이름. 시너.

 

PLAY 3:17

어떻게 해볼 사이도 없이 안경 위로 다시 한 번 액체가 뿌려진다. 이번엔 흠뻑 젖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은 양이다. 생각을 해보려 하지만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뭘 해야 하지? 아니, 뭘 할 수 있지? 그러는 사이 사내 쪽으로부터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샛노란 불이 독사처럼 달려든다. 푸르스름하기도 하고 붉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고 뜨겁기도 한 무언가가 뱀에 물린 것처럼 순식간에 내 몸을 휘덮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람들의 일그러진 표정과 시끄러운 비명뿐이다. 지하철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나는 들고 있던 아이팟을 바라본다. 이 아수라장에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 작고 연약한 기계뿐이다. 3분 24초. 3분25초. 3분 26초. 나는 유니온 스퀘어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녀를 생각한다. 그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할까? 아니, 알릴 수 있을까? 이런 경우, 대체 몇 분이나 늦는다고 해야 하는 걸까? 그녀는 내 말을 믿어줄까? 결국 난 그녀의 대답을 들을 수 없는 걸까……?

빠져나갈 생각도, 사랑한다는 문자도 할 수 없는 나는 그저 지금 바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바랄 수밖에 없다.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의 멜로디를 들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아니 소리 내어 이렇게 외친다. 7초만 더. 7초만 더. 제발, 7초만 더.
*

 

*이루마, <추억과 함께 영원히 둘로 남는다>의 플레잉 타임은 3:3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