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바다 음식과 공황장애

흔히 바다의 음식을 찬양한다. 어부의 만선과 바다의 풍요를 칭송하기도 한다. 간혹 바다에 취재갈 일이 있다. 요리에 쓸 제철 재료가 무엇인지 공부하고, 공급해줄 어민을 만나기 위해서다. 우리는 바다의 덕으로 몸을 살찌우고 미각을 얻는다. 텔레비전에서 바다 음식을 소개하면 시청률이 높게 나온다는 게 정설이다. 싱싱한 바다의 활력이 원초적인 식욕과 기대감을 불러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지역을 탐방하는 카메라는 수산시장을 좋아한다. 그저 카메라를 돌리기만 하면 멋진 그림을 많이 얻을 수 있는 까닭이다. 바닷가에 앉아 회 접시에 술 한 잔을 마실 때도 바다는 감상적이고 즐거운 대상이다. 그러나 막 어로에서 돌아와 배를 묶고 어창에서 꺼낸 고기를 운반하는 어민의 낯빛을 보면 그것은 현실로 바뀐다. 검고 어둡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바다이고, 속을 모르는 바다이고, 무서운 바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몰라, 바다는.”

배를 직접 탈 때가 있다. 겨우 30여분 타고 나가는데도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그 짧은 항해 아닌 항해에도 진짜 두려움이 무엇인지 느껴진다. 파도가 조금이라도 솟을라치면 속이 뒤집어지고, 끝없는 공포로 이어진다. 배 한 척에 사람이 목숨을 걸고 있다는 것은, 그래서 망망한 마음의 끝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일 것 같다. 아기들을 구름다리에 태우면 다리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구토를 하고, 몇 번 선창에서 구르다가 하늘을 보면, 진짜로 ‘노랗다’는 걸 실제로 알게 된다. 하늘색이 푸르지 않다는 것, 시각조차 감정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그때 선장이나 선원이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태생적 공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해준다. “안 죽는다니까. 걱정 말아. 곧 육지에 닿을 테니까. 허허.”

나는 한때 공황장애를 앓았다. 버스도 타지 못했다. 그 폐쇄된 공간이 주는 두려움은 엄청났다. 특히 버스가 정차할 수 없는 고속도로를 달리면 공포가 극한이 되었다. 택시를 타면 안전장치를 잠갔다. 뛰어내릴 것 같은 불상사를 예방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차보다 배가 더 무서웠다. 성난 파도가 있고, 어마어마한 바다에 내가 떠 있다는 것처럼 큰 공포가 어디 있겠는가. 누구에게도 의탁하기 힘들다는 외로움이었으리라. 그래서 상륙해서 차를 타고 움직이면 내 엉덩이에서 느끼는 도로와 바퀴의 물리적 마찰이 차라리 반가웠다. 그것은 살아 있다는 신호였고, 나는 바다에서 느꼈던 옹졸한 공포를 저주하곤 했다. 바퀴가 육지에 닿지 않는 여행이란 이렇게 본질적인 두려움을 인간에게 선사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갇혔다.

이글을 쓰는 순간, 내게 다시 공황이 내려온다. 그들이 느꼈을 공포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른다. 그들이 돌아오기를 모두들 간절히 빈다. 아울러 생존자들이 틀림없이 맞닥뜨릴 공황장애와 같은 외상후증후군도 철저하게 대비해 주길 바란다. 삼가.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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