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라면이 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국수는 고급한 음식이었다. 곱게 밀을 제분하는 기술도 뒤늦게 발전한 데다가 밀 자체가 흔한 농산물이 아니었다. 빵의 원조인 유럽도 온갖 곡물을 넣고 그저 죽을 먹는 일이 흔했다. 오트밀이라고 부르면 그럴듯해 보이는 음식도 실은 그저 ‘귀리죽’이었다. 빵은 세력가들의 차지였다. 빵의 색깔에 의해서도 빈부와 권력의 선이 그어졌다. 검은 빵은 곧 변화될 수 없는 하급 신분을 의미하는 상징이었다.

유럽의 국수 종가는 이탈리아다. 운송의 발달, 기계공업이 성장하면서 남부에서 마른 스파게티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네 옛날 국수가게들이 마당에서 국수를 말리듯,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공터에서는 스파게티가 건조됐다. 국수는 빵보다 더 다양한 식사를 가능하게 했다. 그저 버터를 바르거나 속에 뭘 채워 넣는 게 고작이던 빵과 달리, 국수는 다채로운 요리법을 발휘할 수 있었다. 소스가 국수에 더해져 오늘날의 파스타 왕국이 됐다. 건조한 스파게티는 민중들의 소중한 식량이었다. 그저 삶아서 기름과 소금, 마늘로 한 끼의 음식을 때울 수 있었다. 스파게티가 유행하기 시작하던 나폴리의 과거 사진을 보면 거리에서 손으로 면을 먹는 사람들이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화려한 계란 반죽 면 대신 마른 스파게티를 삶을 수 있게 되면서, 이탈리아는 통일로 다가갈 수 있었다. 누구나 이탈리아반도의 주인이자 역사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자각이 아니었을까.

중국 내륙의 면이던 라면이 일본의 사업가에 의해 인스턴트화되면서 인간의 삶은 많이 바뀌었다. 지금도 최초의 요리는 라면 끓이기다. 요리 재료가 물을 흡수하고 간을 맞추는 초보적인 기술들을 익히게 된다. 화력에 따른 면발의 탄력도 알게 되고, 왜 한꺼번에 많은 양의 라면을 삶으면 맛이 없는지 그 물리적 이유도 터득하는 살아 있는 현장이다. 임춘애씨가 우동이나 국수도, 김밥도 아닌 라면 먹고 뛰었다는 자극적인 기사는 결국 그 음식의 계급적 정서를 반영한다. 김밥 먹고 뛰었다면 임씨의 혼신의 역주를 돋보이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면은 우리에게 그저 식량이나 요리가 아니라 몸과 영혼의 동반자 정도로 대우한다. 우리는 모두 라면을 먹고 이 험한 세상을 견뎌냈고, 그리고 앞으로도 라면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라면은 최악의 현장에 나타나 사람들을 위로한다. 공사 현장에, 농번기의 들에서, 심지어 지금 통곡의 바다가 된 저 남도의 항구에서도 끓고 있다. 라면 한 그릇으로 우리는 눈물을 감추고 쓰린 속을 달래고 있다. 이 와중에 장관이 그 현장에서 라면을 친히 드시는 장면이 국민의 공분을 샀다. 아마도, 그는 재난 현장의 거친 음식을 나누는 공복의 소탈함을 몸소 보여주실 뜻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던 듯하다. 예부터 백성이 무서운 권력자는 국난을 맞아 곡기를 엄격히 제한함으로써 자신의 덕을 보였다. 오직 차가운 물 아래 갇혀 있을 자식들 생각에 식음을 전폐하고 있는 학부모 앞에서 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 죄 없는 라면이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이라면 고생이었을까. 라면 먹을 자격에 대해 생각하는 지금이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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