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잊지 말자, 꽃게의 맛처럼

모처럼 기운을 내서 수산시장에 갔다. 입맛을 잃고 살던 아내가 “요새 게 철인데…”했다.

저 바다 끓고 넘쳐도 무심하게 고기는 잡힌다. 고기야 뭔 시절을 알겠는가. 속 모르는 세월과 달리, 바다는 어김없이 먹을 걸 잊지 않고 인간에게 돌린다.

어황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한다. 기름도 유출되고, 중국 배들도 이 틈을 내서 더 많이 들어오는 까닭일까. 진도 앞바다가 마침 꽃게가 어지간히 올라오는 어장이라고 한다. 꽃게는 그쯤에서 연평도까지 길게 띠를 이루어 잡힌다. 꽃게는 먼 바다에서 놀다가 산란을 하러 연근해로 이동한다. 이때가 게가 많이 먹고 살을 찌운다. 산란을 해야 하니 생식소도 영양을 많이 얻는다. 우리가 게딱지를 벌려서 보는 노란 ‘알’은 실은 알이 아니라 생식소이다.

썰렁한 시장, 게 파는 단골 아주머니는 한숨부터 쉰다. 시절 모르는 외국인들이 관광을 올 뿐, 손님 발길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세월호 사고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왜 아니겠는가, 이 총체적인 부실이 어딘들 또 다른 피해를 주지 않을 리가 없다. 게는 올해 잘 안 잡힌다. 그런데 가격은 예년과 비슷하다. 소비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당 3만원 언저리다. 아주 큰 놈은 더 비싸다.

“큰 놈은 오히려 게장에 잘 안 어울려. 장 담그는 건 중간치가 좋고, 큰 놈들은 쪄서 먹고.”

중간치로 조금 샀다. 게 한 마리를 슬쩍 얹어주며 공치사도 하신다. “살아 있는 놈이라 못 판다고 죽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게장을 담갔다. 감초도 넣고(이것도 국산이 아니구나. 마트에는 우즈베키스탄산밖에 없다) 마늘, 양파, 간장에 달여 부었다. 하루쯤 묵혔다가 꺼내 먹는다. 나의 비겁함을, 무력함을 잊으려고 애써 우적우적 씹는다. 그래도 살아 있는 간사한 입맛이란. 달고 고소한 게장 맛이란. 달아서 더 비겁하고 슬픈 입맛이라니.




새끼 밥에 얹어주고 얼른 먹으라고 재촉하면서 다시 생의 막막함을 생각한다. 먹어야 사는 인생이고, 결국 우리는 죽기 위해 산다. 그래도 이 달랠 길 없는 분노와 허망은 또 무언가. 저 새끼 입에 밥을 더 이상 넣어줄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인가. 이런 상념이 요즘 사람들을 지배한다. 집단 트라우마에 집단적 분노와 냉소가 스모그처럼 이 사회를 자욱하게 메우고 있다. 내 친구는 그 귀중한 완전 침몰 전 한 시간 반을 구명조끼 입고 객실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던 아이들 생각에 늘 목이 멘다고 한다. 좋은 걸 입고 먹어도 이래도 되는 것인지 자책한다고도 한다.

이런 참혹한 대형사건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우리는 이번 건에 유달리 감정이입이 심하다. 어른들의 잘못이란 자책이 심하기도 하거니와, 국가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 물음이 우리를 휘감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저 차가운 바다는 아직 몸을 덥히지 못하였는데 봄은 어김없이 한창이다. 우리가 진짜로 두려워할 것은 어쩌면 인간의 망각 기능이다. 잊어야 살 수 있을 텐데 잊으면 안된다. 이 이율배반의 고통에서 오늘도 묵묵히 밥을 삼킨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