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반지하에 사람이 산다

전국에 반지하 셋방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그 역사가 오래된 건 아니다. 1970년대에 도시는 팽창했다. 낡은 단층 슬래브 집들이 다세대라는 묘한 이름의 주택으로 바뀌었다. 의미로 보자면 아파트도, 호화빌라도 다세대이지만 다세대는 독립적으로 슬픈 이름 다세대다. “다세대 사는 애들과 놀지 말라”는 엄마들이 있던, 가난과 멸시의 상징. 봉준호가 주목한 건 바로 이 멸시가 아니었을까. 더 많은 ‘가구수’를 공급해야 했던 당국과 건폐율을 더 받아서 차익을 바라던 건물주의 이익이 만들어낸 다세대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한 층이라도 세대를 더 만들면 얼마나 이익이 늘겠는가. 주차장이나 창고로 써야 할 공간에 사람이 들어가 살았다. 완전히 지하가 아니라고 해서, 그나마 햇빛이 일정 시간 들어온다는 걸 위안 삼아 반지하라는 명칭이 붙었다. 이 절묘한 명명과 구성은 세계 건축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일이다. 완전한 지하도, 지상도 아닌 반만 지하. 삶도 죽음도 아닌 어정쩡한 무간도적 공간을 봉준호는 주시했을 것이다. 


반지하는 의외로 방 셋짜리가 많았다. 많은 서민들의 꿈이었던 방 셋 가진 독립 세대의 꿈을, 반지하가 이뤄줄 수 있었다. 본디 ‘정상적인’ 건축구조가 아니다 보니, 희한한 일이 많이도 일어났다. 화장실은 툭하면 넘치거나 막혔고(영화에서처럼!), 길가에서 집 안을 들여다보는 행인과 눈을 마주쳤다. 화장실은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 설계되는 경우가 많아서, 샤워할 때 허리를 구부려야 했다. 장마철의 엄청난 습기, 그것이 남기고 가는 곰팡이군단은 또 얼마나 대단하던지. 반지하는 건축비를 아끼려는 건물주의 의도에 따라 천장이 낮게 설계되었다. 덕분에 난방비는 낮아졌고, 대신 반지하도 어쩔 수 없이 ‘지하생활자’라는 자각이 들게끔 실내는 어두웠다. 그 공간은, 더 낮은 단계의 집에서 살던 이들에게는 그래도 천국이었다. 


내가 다세대에 입주하던 날, 어머니의 환한 웃음을 잊을 수 없다. 온전한 독채, 내 집을 가진 날이었으니까. 반지하는 낮은 곳에 임하였으나, 그 집은 또한 가장 높은 곳에 있게 마련이었다. 마을버스도 잘 들어가지 않는 등고선 진한 위치가 토지비용이 훨씬 싸서 집장수들이 좋아할 만했다. 땀 흘려 올라가서, 낮은 곳에 깃드는 것이야말로 반지하적 삶의 표준적인 퇴근 방식이었다. 거기서 사람들은 밥을 끓이고, 상을 차렸다. 대통령이 몇 번 바뀌고, 나는 그 공간에서 벗어났고 지하생활자들에 대한 관심도 잊었다. 봉준호가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찌 기생충의 연혁을 되돌아볼 수 있었을까.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