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불고기판의 원형

어렸을 때 우리집은 살림이 작아서 별 외식을 못했다. 입학·졸업식날에 남들처럼 짜장면 먹는 게 고작이었다. 아마도 탕수육은 시켰다 말았다 했던 것 같다. 비쌌으니까. 어머니가 간혹 냉면집을 데려가거나, 아버지가 돼지갈비를 먹여주신 날이 특별하게 생각이 날 정도다. 그런 중에도 종로에서 불고깃집을 간 것은 각별한 기억이다. 위생복을 입은 홀 직원들이 있고, 타일로 벽을 장식한 1960, 70년대식의 그런 불고깃집이었다. 나중에 그 집이 한일관이라는 걸 알았다. 종로의 터줏대감이었다. 화신백화점 맞은편에 있던 신신백화점과 명동에도 분점을 두었던 아주 큰 규모의 식당이었다. 불고기에 냉면. 그 집의 공식이었다. 강남으로 옮긴 지금도 이 음식을 먹으러 서울시민들이 간다.

 

 

한식 하면 불고기와 김치를 떠올린다. 불고기는 우리가 소고기를 어지간히 좋아했던 역사를 응축한다. 조선시대에는 금살도감까지 설치해서 소 도축을 막았다. 농사가 근본인 조선에서 소는 곧 숨 쉬는 경운기였다. 농기계를 잡아먹는 건 농사를 망치는 일이었다. 소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노동력의 상징이고, 영물(靈物)이라 하여 가족 대우를 했다. 그런 판국에서도 소고기 먹는 일은 여전했다. 맛있는 것에 대한 갈망은 형벌로도 막을 수 없었으리라. 그 시절 소고기 요리가 불고기와 흡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궁궐과 북촌사대부집에서 먹던 ‘너비아니’라는 요리로 불고기의 면모를 추정해보곤 한다. 너붓하게 썰어서 간장과 참기름으로 양념해서 굽는 것이니, 불고기와 흡사한 맛이었을 것 같다.

 

중요한 의문 한 가지가 생긴다. 조선 후기의 불고기 굽는 장면을 보면 ‘전립투’라고 하여 벙거지 엎어놓은 것 같은 도구를 썼다. 이것이 언제부터인가 지금과 같은 구멍 뚫리고 국물받이 있는 불고기판으로 바뀌었다. 이 도구가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불고기가 성행하던 옛 서울의 유명 언론인인 조풍연 선생은 “미군들이 쓰던 드럼통을 두들겨서 만든 것이 현재와 같은 불고기판의 원형”이라고 말한다. 또 아동문학가와 미식가로 유명했던 마해송 선생도 수필에서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 서울사람으로 ‘서서갈비’라는 독특한 불갈빗집의 원조인 이대현 선생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한일관의 옛 직원들도 “석쇠불고기를 팔다가 나중에 지금과 같은 불판에 얇게 저민 불고기를 얹어 팔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특히 1960년대 말, 고기를 얇게 저밀 수 있는 육절기가 도입되면서 현재와 같은 불고기 시대가 열렸다고 말한다. 칼로는 지금처럼 고기를 얇게 자를 수 없다. 6·25전쟁으로 미군이 들어와서 ‘도라무깡’이라는 물자를 남기고, 현대의 전동 도구가 합쳐져 우리에게 각인된 불고기의 모습을 완성시킨 것이다. 한 500년은 된 듯한 ‘전통의 불고기’도 실은 현대의 산물인 셈이다. 자료를 보니, 불고기판도 특허 등록된 것이 꽤 많다. 노회찬 의원이 한때 불판을 바꾸자고 해서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불고기판도 바뀌는데, 세상의 불판은 좀체 바뀌지 않는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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