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을지로의 조촐한 술집들

서울 시내 지명은 오래전부터 불렀거나 식민지시대에 일제가 만들어 붙인 경우, 해방 후에 새로 붙인 이름이 뒤섞여 있다. 팔판동이나 운니동은 옛 이름이고, 을지로나 충무로는 일제 잔재를 걷어내며 새로 붙인 지명이다.

 

을지로는 한때 가장 강력한 도심이었다. 유명 기업의 본사가 많았고, 청계천을 따라 남쪽으로 공구상과 철공소, 인쇄소 같은 산업의 동력이 있었다. 그만큼 사람도 많이 모였으니 맛있는 집도 성가를 높였다.

 

유명짜하고 큰 식당뿐 아니라 좁고 미로 같은 골목 안에 작은 밥집들이 숨어 있었다. 기름밥 먹는 노동자들이 주 손님이었는데 나중에는 와이셔츠 부대들도 그 맛을 알고 찾아들었다. 입정동 일대, 을지로3가동 일대에 그런 집들이 많다. 특히 이 일대는 철공소 골목이 발달해서 아주 독특한 기운을 풍긴다. 쇳가루와 망치질 소리가 한때는 이 골목을 채웠다. 이제는 조금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다.

 

 

오래전부터 재개발설이 돌았는데, 최근 다시 말이 나오는 모양이다. 재개발에 반대한다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는 걸 보니 말이다. 입정동(笠井洞)은 ‘갓 만드는 집에 우물이 있어’서 그렇게 명명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천하의 명소가 된 을지면옥이 있는데, 뒷골목에 나름 이름난 맛집과 노포들이 있다.

 

그중 세진식당은 초여름부터 하는 갑오징어 숙회나 오징어볶음으로 이름이 났다. 갑오징어는 예전에는 많이 잡혀서 싸고 흔했는데, 언젠가부터 ‘시가’라고 붙어 있다. 잘 안 잡힌다는 소리다. 두툼하게 썰어 내는 갑오징어 숙회는 이빨이 쿡쿡 박히도록 졸깃하고 맛있다. 날씨가 추워지면 생태찌개가 명물이다. 좁은 식탁에 친구들과 옹기종기 앉아 얼큰한 찌개상을 받고 싶을 때 가는 집이다. 동원집도 빼놓을 수 없다. 순댓국도 좋고 감잣국도 일품이다. 요즘은 다 감자탕이라고 부르지만 본디 감잣국이 맞는 말이다. 여전히 이 집에서는 감잣국이라고 부른다. 감잣국답게 감자를 정말 실하게 넣어주고 시원한 국물이 좋다.

 

통일집이라는 희한한 상호의 고깃집도 있다. 암소 등심을 연탄에 막 구워서 먹는데 값이 비싸지 않고 양이 많은 편이다. 옛날식으로 빨간색 페인트로 막 써놓은 간판이 우수를 자아낸다. 고기 먹고 시키는 된장찌개도 명물이다. 철공소가 문을 닫은 저녁이면, 아예 길에 내놓고 고기를 굽는 맛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안쪽으로 붙은 을지로3가동으로 가도 명물집이 많다. 우일집의 곱창 한번 안 먹어봤으면 을지로 월급쟁이가 아니라고 했다. 지금도 여전히 곱창 굽는 연기가 자욱하다.

 

그 옆의 안성집은 또 어떤가. 돼지갈비의 한 역사가 이 집에 있다. 식사로 먹는 육개장도 전국적 반열에 오른 집이다. 이런 곳 말고도 구석구석에 간단한 술과 안주, 라면 따위를 파는 가겟방이나 그야말로 조촐한 밥집이 꽤 많다. 자기만의 밥집, 술집을 발굴해내는 재미가 있다.

 

요즘처럼 썰렁한 시절, 따스한 을지로 골목 기행도 좋겠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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