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이용재의 건축과 음식 사이

새단장한 지하철역과 '디자인'의 주체



이제는 그 역을 더 이상 ‘동대문 운동장’이라고 부를 수 없다. 운동장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고교 야구의 추억을 안고 있는 운동장은 역사와 문화를 듬뿍 안은 공원의 제물로 바쳐졌다. 공원으로 조성한다고 하니 당연히 공원이 되겠지만, 그 이름처럼 ‘역사’와 ‘문화’를 담을 수 있을지 솔직히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무엇으로 그 역사와 문화를 자아낼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홈페이지를 찾아보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은 “서울의 살아있는 역사를 만나는 역사공원”이라고 한다. 동대문 운동장은 살아있는 역사를 만들 자격이나 역량이 없기 때문에 헐어야만 했을까?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알려진 것처럼, 동대문운동장 터에 새 ‘디자인 플라자 & 파크’를 시공하는 와중에서 조선시대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유적 때문에 플라자의 준공 시기 또한 늦춰졌다. 오래된 유적은 지켜야할 가치가 있지만 비교적 근현대(1926년)에 세상의 빛을 본 동대문운동장은 그럴 가치가 없었을까? 전쟁이다 뭐다 해서 아주 오래된 건물들도 남아있지 않지만, 625전쟁 이후에 지어진 근현대의 건물들 또한 사실 살아남기가 힘든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현재와의 거리에 비례에 역사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기준이 무엇인지는 정말 잘 모르겠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주요시설 목록을 보면, 기념관과 같은 전시시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전시품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본래의 기능이나 가치를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전시되는 의자와 실제로 앉는 의자는 다르다. 전시되는 의자는 살아있는 의자가 아니다. 의자로서의 기능을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더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살아있는 역사”라는 말이 정말 말이 되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역사라는 개념 자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살아있는 역사를 만나”는 역사공원이라고 하니 일단 믿어보자. 어차피 이 글은 공원 그 자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쓰는 글도 아니다. 공원에 대한 글은 공원이 담고 있는 역사가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있는지 확인한 다음에 자세하게 쓰도록 하겠다. 


다시 지하철역으로 돌아오자. 방산시장에 제과 재료를 사러 갔다가 오랜만에 동대문문화역사공원역-아홉 글자로 가장 긴 역 이름이라고 한다-에서 5호선을 타게 되었다. 끝도 없이 더 깊은 땅 속으로 내려가면서 역이 새단장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부분의 천장에는 우주왕복선이나 로케트의 분사구를 닮은 거대한 조명-이라기 보다는 그저 전등갓?-이 달려 있었는데 단순한 장식이나 조형 외의 의미를 읽기가 어려웠다. 



노란색이 두드러지는 간접조명과 인터넷을 뒤져 ‘고궁갈색’ 이라고 추정되는 자주색과 갈색 사이의 주색 또한 인상적이었지만, 새로 단장한 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의자였다. 일단 너무 드문드문, 그것도 인색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놀랐고, 그렇게 자리 잡고 있는 것들마저 엉덩이를 정말 간신히 걸치고 앉을 수 있을 정도의 야박한 폭이어서 다시 한 번 놀랐다. 물론, 무려 세 노선이 만나는 곳이니만큼 환승 인구를 고려했을 때 의자를 많이 두기 어렵다는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가능한 변명조차 궁색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키오스크(kiosk: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노선 정보며 출구 안내 등의 정보를 담고 있는 설치물)’며 쓰레기통 등이 만만치 않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종류의 정보며 설치물 또한 공공장소에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의자와 비교했을 때 치수나 그 설치 빈도의 비례는 과연 어떠한 기준에서 맞추었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사람의 자리가 다른 것들의 존재에 밀려 좁아 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디자인 서울’의 철학은 무엇일까. 디자인이라는 말은 참 하기도 쉽고, 써 먹기도 쉽다는 생각이 든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된다. 서울 디자인 재단의 홈페이지를 보면,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셀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지만, 정작 그 디자인이라는 행위 자체가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아, “살기 좋고, 오고 싶고, 머물고 싶은 서울을 만들자”는 목표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살기 좋게, 오고 싶게, 머물고 싶게’ 만드는 행위가 디자인 서울이라는 프로젝트에서 생각하고 있는 디자인의 정의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 디자인 프로젝트의 주체, 또는 혜택을 받는 대상은 당연히 사람이어야 할 텐데, 내가 찍은 사진의 사람들은 의자에 엉덩이를 반만 걸치고 앉아서 다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 애초에 저 의자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세 개가 붙어 있는 것 가운데 가운데의 의자는 양 옆의 것보다 높거나 낮다. 세 사람이 겨울옷을 입으면 다닥다닥, 불편하게 붙어 앉아야 할 만큼 좁은데다가 높이차까지 있으니 앉기가 더더욱 불편해 보인다. 의자는 이렇게 불편한 싸구려처럼 생겼는데, 거대한 전등갓이 있고 친절하게 출구 정보를 알려주는 키오스크가 있으며, 재활용 쓰레기마저 깔끔하게 분리수거할 수 있도록 만든 쓰레기통도 있다. 아, 그리고 다음 지하철을 기다리는 데 지루하지 말라고 각 출입구마다 커다란 텔레비전을 달아 요즘 한참 유행이라는 드라마를 보여주기도 한다. 얼핏 보면 그림 좋아보이게 모든 걸 다 갖춘 것 같지만, 정작 사람들은 드문드문 자리 잡은 의자에서 엉덩이를 반만 걸치고 불편하게 앉아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런 건 잘 보이지도 않는다. 다른 것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이 워낙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진을 찍어서 보고 있노라면 정말, 살기 좋아 보이고 오고 싶고 또 머물고 싶어 보인다. ‘디자인 서울’이라는 것이 이렇다. 거리를 두고 보면 참 좋아 보인다. 우리는 피사체일 때 가장 의미 있는 존재가, 디자인의 주체가 된다. 디자인 서울의 지향점은 바로 그런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