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보다

세계에 한국 미술을 심는 작가들

김승영, Are you free from yourself, 2022. Document Photography 제공

 

한국의 국공립 미술관은 언제부터인가 시장에서 몸값 높은 작가들의 알리바이나 만들어주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비엔날레의 다수는 서구의 방법론을 끝없이 답습하는 낡은 행사로 추락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숫자만 많지 의미적이진 않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우수한 시각 예술가를 양성할 수 있는 정책마저 변변한 게 없다. 비참함을 억누르곤 얼마나 가난한지를 증명해야 알량한 몇 푼의 지원금을 쥘 수 있고, 취향에 읍소하는 ‘상품 생산자’들을 세금으로 뒷받침하는 게 예술경영이라 여기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한국 미술의 건강한 성장을 견인하는 데에는 부족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만의 형식과 언어로 무대를 확장해가고 있는 예술가들이 있다. 미술계에선 흔히 양혜규, 신미경, 서도호, 방혜자, 김수자, 이불 등을 꼽는다. 그러나 세계로 영역을 넓히고 있는 작가들은 이보다 많다.

2022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이름을 올린 정금형과 이미래를 비롯해 한국 작가로선 유일하게 ‘카셀 도쿠멘타15’에 참여한 ‘이끼바위쿠르르’ 등이 그렇다. 얼마 전 호주 파워하우스에서 열린 전시에 작품을 선보인 김승영도 빼놓을 수 없다. 한지 작가로 잘 알려진 김민정이나 한국계인 아니카 이, 김아영, 이슬기, 김구림, 이건용, 박대성 역시 국가 간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들이다.

이 중 김승영은 예술의 물화에 부응하지 않은 채 묵묵히 제 길을 걸어온 작가 중 한 명이다. 명상과 사유가 혼재된 그의 작업은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지향가치인 인간다움을 발견하게 하고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인 화해, 소통, 치유는 우리네 삶에 드리운 고통의 무게를 덜어내도록 돕는다.

이러한 김승영 작업의 특징은 지난 5월15일 막을 내린 한국·호주 수교 60주년 기념전 ‘창령사 터 오백나한’에서도 빛을 발했다. 파격적이게도 그는 박물관 유물을 보호하는 유리관을 벗기고 나한상을 관람객과 직접 대면하게 함으로써 번뇌의 얽매임과 미혹의 괴로움에서 벗어난 나한이 우리의 모습이요, 우리도 나한의 모습일 수 있음을 보여줬다.

전시장 바닥에는 감정의 낱말을 새긴 1만여장의 벽돌을 깔아 마음에 내재된 덧없는 생각들을 털어내게 했다. 공간 한편에는 1157개의 스피커로 탑을 쌓아 종소리, 물소리 등의 다양한 소리를 심었다. 이 소리는 소박하고 푸근한 나한의 표정 사이로 고요하게 휘몰아쳤고 시공에 감춰진 역사의 음성을 실어 날랐다.

국립춘천박물관 소장품으로 구성된 고려시대 나한 석조상 50여점의 첫 해외 전시인 ‘창령사 터 오백나한’전은 외신의 호평을 받으며 누적 관람객 수 23만명을 끌어 모았다. 나한의 정겨움과 소박함이 성공적 개최에 한몫했지만, 인간 마음속 깊은 감정의 층들을 나한과 연결해 진정한 삶의 가치에 대해 질문한 김승영의 작업으로 인해 더욱 돋보일 수 있었다.

김승영 외에도 한국의 차별화된 미학을 세계 곳곳에 전파하는 작가들이 있다. 미술 본연의 아름다움에 충실하면서도 저마다의 눈부신 삶을 찾아낼 수 있도록 인도하는 작가들도 적지 않다. 비록 시장미술의 가벼움이 현실을 짓누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이들의 활동이 무게감 있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홍경한 미술평론가·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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