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여름 국수

한 냉면집에 갔다가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놀랐다. 여름이구나, 차가운 음식의 계절이구나 했다. 국수 중에서도 여름에 먹는 계절음식이 있다. 먼저 오이냉국에 말아먹는 소면이다. 미역을 띄우고 식초로 양념해서 소면을 말아내면, 몇 그릇이고 먹었다. 집 밖에서 먹는 국수로는 냉면이 으뜸이었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 중 어느 것을 고를까 햄릿에 가까운 고민을 하곤 했다. 나이가 들면서 점차 평양쪽으로 기울어가다가 요즘엔 다시 함흥냉면의 재발견을 하고 있다. 그 원형이 어떠니 따질 것도 없이 한 그릇 하고 나오면 매운 기운에 땀을 흘리게 된다. 여름 음식으로 제몫을 하는 셈이다. 한창 손님이 몰려서 홀 지배인이 정신없이 마이크로 주방에 주문 넣는 소리를 듣는 것도 유서 깊은 함흥냉면집의 재미다. 평양냉면도 물론 종종 찾는데, 최근에 새로운 집들이 생겨나고 있다. 막국수와 함흥냉면은 몰라도 평양냉면은 원조집들이 많아 ‘진입’이 거의 불가능한 시장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에 판교와 여의도, 마포에 괜찮은 새로운 냉면집들이 생겨나 선전 중이다. 하기야 원조와 전통도 처음부터 터줏대감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월이 쌓이고 손님이 자꾸 찾으면 그 집도 전통을 갖게 될 터이다. 재래시장에 있는 오래된 냉면집도 뉴스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나오면서 새로운 각광을 받고 있다. 시장은 상품이 거래되는 곳이지만 전통적으로 까다로운 시장 상인들 입맛에 맞는 식당도 번성했다. 재래시장의 경기가 위축되었다는데, 이런 식당들은 윤기 있게 사람들이 몰린다. 대낮에 냉면 한 그릇 하고 나설 때 땡볕에 손님도 없이 노출된 노점을 보는 것이 불편해서 자주 가지는 않지만.


냉면이 그랬듯이 막국수도 원래는 겨울음식이었다. 동치미가 익고, 갓 수확한 메밀이 넉넉한 겨울에 먹었다. 요즘은 김치냉장고 덕으로 한여름에도 잘 익은 동치미 국물의 막국수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영서냐 영동이냐, 그중에서도 강원 내륙 군부대 마을식이냐 춘천의 관광지식이냐 가르는 재미가 있다. 막국수 철에는 콩국수도 고개를 내민다. 뻑뻑해야 진국이라고 하니, 품위 있게 먹자면 지나치지 않게 농도가 적당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콩국수도 나름 각기 다른 이론(?)과 취향이 격돌한다. 이런 재미로 국숫집을 찾는 것이겠다. 본디 일본식이었던 ‘자루소바’의 한국식 버전도 여름에 맞는 음식이다. 짠 소스에 면을 찍어 먹는 것이 일본식이라면, 한국에서는 아예 국물처럼 넉넉하게 내서 말아먹듯이 하는 이른바 ‘판메밀’ 국수도 있다. 정통을 내세우며 일본식으로 메밀을 내는 집들도 꽤 있다. 좋은 메밀을 충분히 써서 고급을 지향하는데, 흥미로운 메밀국수가 분명하다. 올여름, 우리는 어떤 국수를 먹을 것인지 생각해보자. 더위가 주는 입맛이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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