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빙수

일전에 부산 어묵을 취재하러 갔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부산항 어시장에서 영도에 있는 공장까지 어묵용 잡어를 실어나를 때 ‘뒤밀이꾼’이 있었다고 한다. 트럭이 귀해서 대개 리어카를 썼고, 이때 피란민 아이들이 뒤밀이로 나서 몇 푼 잔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혹한과 땡볕을 마다하지 않고 뒤를 밀어 동전을 벌던 소년들이 당시에는 흔했다. 내가 자라던 시절에도 그런 일이 꽤 있었다. 행상 아저씨들이 리어카를 끌고 골목을 다녔기 때문에, 때로 뒤밀이가 필요했다. 소년들이 그걸 감당하고, 푼돈을 얻어 썼다.

내게도 그런 찬스(?)가 가끔 왔던 기억이 있다. 한번은 산더미처럼 고물을 실은 리어카 뒤를 밀었다. 리어카를 밀 때는 요령이 있는데, 힘을 아껴두었다가 바퀴가 슬슬 밀릴 때 ‘터보’처럼 밀어야 한다. 더 힘든 건 오히려 내리막길이다. 리어카에 가속도가 붙지 않도록 힘껏 잡아당기는 게 일이었다. 리어카에 매달려 내려갈 때 운동화가 질질 끌려서 발바닥이 화끈화끈했던 기억도 난다. 그렇게 밀고 나면 딱 십원을 받았다.

한여름, 땀 흘려 번(?) 돈으로 곧장 달려가는 곳은 빙수집이었다. 먼저 아이스박스에서 사각 얼음을 꺼내서 에펠탑처럼 생긴 주물 빙수기계에 끼운다. 날카로운 금속이빨이 얼음을 고정시킨 후 갈아서 내는 빙수 말이다. 아저씨가 빙수 손잡이를 돌려 얼음을 삭삭, 갈아내면 받쳐둔 그릇에 수정 같은 눈이 수북이 담겼다. 갈린 얼음이야 까짓 몇 푼 되지 않는 것이니 인심도 후했다. 아저씨는 어떻게 하면 유리그릇에 더 높게 얼음을 쌓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반짝이는 얼음 산 위에 달다 못해 쓰기까지 한 인공감미료가 섞인 온갖 색소를 끼얹었다.


오색의 물감이 얹힌 빙수 한 그릇. 영양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지금 생각하면, 건더기 없이 색깔만 허망한 알록달록 빙수는 여러 가지로 암울했던 1970년대의 극적 상징 같기도 하다.

흑백 화면에 갑자기 끼어든 원색 그림 같은. 에펠탑을 닮은 옛날 주물 빙수기계는 전자동에 밀려 자취를 감추었는데, 일본에 가면 지금도 그 원형을 볼 수 있다. 빙수 문화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요즘 빙수 전성시대다. 빙수를 전문적으로 파는 프랜차이즈 상점도 많다. 눈꽃 빙수니, 타이완 빙수니 하는 것이 나오고, 아예 일제강점기의 향수를 불러오는 듯한 빙수도 있다. 최근의 빙수는 색소로 겨우 꾸몄던 옛날과 달리 풍성한 고명이 돋보인다. 마치 ‘파르페’처럼 온갖 서양식 고명을 얹는 것도 많다. 아이스크림은 물론이고 초콜릿 과자를 듬뿍 올리기도 한다. 그래도 여전히 빙수 시대의 강자는 팥이고, 그 단순한 맛을 잘 내는 집들이 명소로 인기를 끈다. 한번쯤 추억의 인공색소 빙수를 먹어보고 싶은데, 파는 곳을 모르겠다. 도로가 후끈 달궈지고 동네 노인들이 베로 짠 잠방이를 꺼내 입을 무렵, 거리에 빨간색의 ‘냉면개시’ 깃발이 달리고, 빙수 가게에 사람들이 몰려갔다. 그 서울의 여름은 다 어디 간 것일까. 이른 더운 날씨에 추억이 떠올라 잠시 먹먹해진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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