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비어 있는 종이는 그 가능성과 비례하여 시작에 대한 막막함을 던지기 마련이지만 “언제나 백지 앞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작가 김정기에게 빈 종이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설렘의 장이다. 밑그림 없이 시작하는 라이브 드로잉인데도 치밀하고 섬세하게 펼쳐지는 그의 그림은 우리의 익숙한 일상을 현실 너머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연결한다.
휴지든, 전단이든, 달력이든 관계없이 그 종이 위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끄적이며 훈련해온 그는 눈앞의 대상을 보고 옮기기보다, 오로지 기억에 의존해 그린다. 그렇게 그릴 수 있기까지 그는 스쳐지나가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림일기를 그리면서 시각적인 기억력을 높였다. 오랜 세월 머릿속에 저장해온 장소, 사람의 이미지와 이야기가 작가의 호흡에 실려 펼쳐지면, 어느 한쪽 시선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시각과 소재를 담고 싶어 선택한 파노라마 화면은 익숙함과 생경함이 뒤섞인 역동적 에너지를 분출한다. 어떤 대상이든 그 대상 특유의 생명력을 이끌어내고 싶어 자유로운 붓질을 추구한 덕분인지, 그의 화면은 흑백인데도 생생하다.
얼마 전 갑자기 세상을 떠난 그의 작품 ‘삶_죽음, 미래 어딘가를 향하여’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엿본다. 인류가 구축한 삶의 공간이 지표면을 타고 솟아 있고, 사냥에 나선 듯, 나체에 가까운 사람들이 동물을 타고 공간을 누빈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무화시키며 하나의 땅 위에 올라선 생명과 비생명이 뒤섞여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새롭게 인식시킨다.
세상에는 아직 볼 것도 많고 그릴 것도 많다는 사실에 가슴이 뛴다는 작가의 말을 떠올리며, 만물이 얽혀 의지하고 반목하는 화면 앞에서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