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칼럼

[이기호의 미니픽션]써 본다, 그때처럼 ‘메리 크리스마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진만은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통신회사의 설문조사에 응했다. 5분 정도 설문조사에 참여해주면 사은품을 준다는 산타 복장을 한 영업사원의 말에 그러지 뭐, 바쁜 것도 없는데, 순순히 볼펜을 집어 들었다. 휴대전화는 몇 년에 한 번씩 교체하는가, 한 달 평균 데이터 사용량은 얼마인가 같은 질문에 진만은 진지하게, 고심하면서 답을 적었다. 서술형 문항까지 정성스럽게 적은 진만에게 영업사원은 작은 비닐봉지 하나를 내밀었다. 그게 사은품이라고 했다.

“이게 뭐죠?”

진만이 묻자 영업사원이 산타 모자를 고쳐 쓰며 답했다.

“크리스마스카드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진만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속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진만은 한참 동안 휴대전화로 유튜브를 봤다. 그러다가 책상 위 아무렇게나 던져둔 크리스마스카드를 꺼내 보았다. 카드 봉투가 좀 크다 싶었는데, 꺼내 보니 나름 입체 크리스마스카드였다. 루돌프와 크리스마스트리와 산타가 마치 담장 뒤에 숨어 있던 아이들처럼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그리고 작게 흘러나오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진만은 카드를 몇 번 접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루돌프와 산타는 계속 웃는 얼굴로 등장했고 또 말없이 퇴장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어쩐지 좀 슬프게 들리기도 했다. 진만은 크리스마스카드를 언제 받아보았나,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았다. 그러니까 이메일로 오는 크리스마스카드가 아닌, 진짜 크리스마스카드. 생각해보니 그건 진짜 오래전 일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5학년 때인가, 집 근처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교회 초등부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서 받은 카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항상 너와 함께하기를. 주로 그런 내용이었다. 그 친구들은 다 은총을 받았을까? 한데 왜 우리 집은 크리스마스 때 외식은커녕 치킨 한번 시켜 먹지 않았던가? 그 정도는 괜찮았을 텐데… 진만은 괜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진만은 아버지에게 입체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기로 했다. 바로 쓰다가 틀리면 곤란하니까, 진만은 포스트잇에 먼저 글귀를 적어보기로 했다. 아버지, 메리 크리스마스! 진만은 그렇게 적었다가 바로 쭉쭉 지워버렸다. 어쩐지 아버지가 뜨악하게 그 문장을 바라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뭐라고 적지? 진만은 궁리했다. 아버지, 크리스마스예요. 아버지, 아버지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어떤 기분이셨어요? 그냥 제헌절이나 국군의날하고 똑같았나요? 저는 요즘 좀 그렇거든요… 그래도 아버지, 그냥 그런 날엔 치킨이라도 한 마리 시켜주시지. 진만은 거기까지 적다가 다시 다 지워버렸다. 아무래도 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는 건, 그건 좀 아닌 것 같았다. 난생처음 아들한테 받은 크리스마스카드에서 루돌프와 산타가 튀어나오면, 그러면 좀 놀라지 않으실까? 얘가 어디가 아픈가? 얘가 무슨 돈이 필요한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까?

 

그럼 누구에게 보내지? 진만은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몇몇 친구 얼굴이 떠올랐으나 주소도 몰랐고, 별달리 할 말도 없었다. 함께 사는 정용에게 보내는 게 가장 나을 텐데, 그건 또 쑥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얼마 전에 정용이 모자란 자취방 보증금도 다 내주었는데… 어쩌면 그것 때문에 크리스마스카드를 주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아이 씨, 나는 왜 크리스마스카드를 쓰면서도 계속 돈 걱정을 하는 것일까? 이게 무슨 신용카드 전표에 사인하는 것도 아닌데….

 

진만은 카드를 펼쳐놓고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무작정 그 위에 한 자 한 자 적어나갔다.

 

진만아, 메리 크리스마스!

진만아, 올해도 고생 많았다. 우유회사 영업사원 하다가 금방 잘리기도 하고, 택배 일도 하고, 다쳐서 입원도 하고. 넌 정말 루돌프처럼 살았어! 루돌프도 이렇게 웃고 있으니, 그러니 너도 좀 웃으렴.

진만아, 크리스마스라고 어디 나가지도 말고, 방에만 있으렴. 올해는 다 같이 못 나가니까 그래도 좀 덜 쓸쓸하겠다. 그럼 정말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되겠지.

진만아, 내년에도 잘 살자. 잘 살자.

 

진만은 거기까지 적고 카드를 덮었다. 정말 주위가 고요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