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의 미래

이탈리아의 슬로 패스트푸드

이탈리아 음식과 문화에 대한 자료 수집을 위해 지난 8월 말부터 2주 정도 이탈리아를 다녀왔다. 코로나19 유행 이후 처음이었다. 갈 곳도 볼 것도 많았다. 그렇게 다니던 어느 날, 이탈리아 친구들이 햄버거를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 제안을 한 친구에게 “나 원래 햄버거 잘 안 먹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건 네가 아는 그 햄버거가 아니라 ‘슬로 패스트푸드’야”라는 답변을 들었다. 나는 ‘소리 없는 아우성’쯤인 형용모순적 표현에 흥미를 느껴 그들을 따라 ‘맥번’이란 햄버거집에 가봤다. 소고기 패티의 햄버거에 감자튀김 그리고 공정무역 콜라세트를 시켜봤다. 가격은 14유로(약 1만9000원)로 약간 비쌌다. 

그렇지만 빵부터 달랐다. 익숙한 미국식 번이 아니라 2배 크기의 이탈리아 전통빵이었다.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웠다. 고기 패티와 감자튀김은 둘 다 냉동이 아니라는 점이 놀라웠다. 심지어 패티가 핑크빛이 돌아도 역하지 않았다. 피에몬테는 파소네라는 우람한 소가 유명하다. 이 가게는 이런 지역 명물 소고기와 지역 채소를 이용해 햄버거를 만든다. 또 화학첨가제나 인공 감미료를 쓰지 않는다. 미국식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햄버거를 이탈리아가 처음 창안한 슬로푸드로 재창조한 것이다.

또 인상적이었던 가게가 ‘푸어만저’였다. 푸어만저(poormanger)는 ‘가난한 자의 음식’이라는 영어와 이탈리아어의 합성어다. 큰 감자를 구워 그릇으로 삼고 그 위에 각종 이탈리아 전통 요리를 올려준다. 가장 싼 것이 5유로다. 그런데 이 집은 감자부터 두르는 오일 그리고 식재료를 대부분 피에몬테와 그 주변 최상급 농산물을 쓴다. 가격을 맞추기 위해 수입 농산물을 쓰지 않는다. 게다가 매장에서는 플라스틱이나 비닐을 사용하지 않는다. 지속 가능한 성장과 지구환경을 생각해서다. 가격 대비 맛은 물론이고 철학도 확실했다. 그래서 사람이 몰렸다.

두 집뿐 아니라 이탈리아의 저렴한 길거리 음식점은 어떻게든 전통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고집 같은 게 느껴진다. 예를 들면, 삼각김밥을 연상케 하는 개당 5유로짜리 로마식 삼각형 피자집(트라피치노)도 돌로 간 밀가루를 전통방식으로 발효한 빵을 쓴다. 빵을 굽는 데만 최소 이틀이 걸린다. 가격이 싼 음식점에서 중국산 쌀과 김치를 별 고민 없이 쓰는 우리나라와는 참 다른 문화다.

나는 강연할 때마다 수강생에게 김치와 집간장이 전통적 방식이 아니라 수입 김치와 공장식 간장으로 대체되는 것에 대한 의견을 종종 묻는다. 그러면 열에 아홉은 “비용 차원에서 어쩔 수 없다” “중국 김치도 결국은 김치다”라는 대답을 한다. 먹는 것도 우리는 미국식 효율과 속도에 경도돼 있는 건 아닐까.

그렇지만 한국의 전통음식은 이탈리아처럼 태생이 슬로푸드다. 가장 기본인 간장·된장·고추장 그리고 김치는 오랜 숙성을 전제로 한다. ‘빨리 빨리’라는 다그침만으로는 그 맛이 나올 수 없다. 느리게 가더라도 황소걸음으로 가려는 이탈리아의 ‘슬로 패스트푸드’라는 새로운 음식 장르가 탐이 나는 까닭이다.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

 

 

 

연재 | 음식의 미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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