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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진은숙이 본 ‘정명훈 논란’(3) -예술가의 '인간성'과 정치적 올바름

다음의 글들은 이번 논란이 진행되는 동안 인터넷에서 거론되었던 여러가지 이슈에 대한 나의 의견들이다. 난생 처음 들어가본 한국 인터넷은 나에게 마치 열어봐서는 안되는 판도라의 상자 같았다. 억지주장과 인신공격, 오만가지 비방과 욕설에, 심지어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지나간 사건의 망령까지 다시 살아나 그 안에서 춤추고 있었다. 나는 이 세계를 모르고 살았던 나의 이전 삶이 그립다.


서울시향의 정체성

서울시향 내에 외국인 연주자가 15%를 차지한다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됐다. 이 지구상에 있는 준 선진국 이상의 국가에 있는 오케스트라에는 정규단원이든 아니든 외국인 연주자들이 들어가 있다. 오케스트라를 발전시키는 데에 비음악적인 각도에서 나온 ‘순혈주의’ 정책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외국의 유수 오케스트라에 한국 연주자들이 많이 들어가있지만 그 오케스트라가 그것 때문에 한국 오케스트라가 되지 않는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한 오케스트라의 정체성은 그 오케스트라가 있는 나라와 도시에 의해 정의된다. 
지난 2010년 서울시향의 유럽 투어 중 유럽 청중들은 당연히 한국 단원들 사이사이에 끼어앉은 외국인 단원들을 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 같이 ‘한국 오케스트라’에 대해 열광했고 찬사를 보냈다. 그들에게는 서양 연주자들이 같이 연주를 해도 서울시향은 한국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명백한 ‘한국의 오케스트라’이다. 외국에서도 인정한 이런 명백한 서울시향의 정체성을 왜 우리 스스로가 부정해야만 하는가?

논란은 계속된다. 이 연주자들이 다 정명훈 밑에서 일하러 왔기 때문에 그가 여기를 떠나면 서울시향은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고이다. 그런 현상을 설명하려면 서울시향보다는 대한민국 음악계의 판도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는 음악 인구가 다른 나라에 비해 많지만 주로 주요 악기에 편중되어있다. 누구든지 멋있는 솔로악기인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하고 싶어한다. 근래 들어 다른 현악기나 관악기, 타악기 쪽으로 많이 폭이 넓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그 층이 두텁다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악기들이 골고루 들어가 있는 오케스트라라는 단체를 한국 사람들로만 채우는 것이 힘들다.
물론 현재 주요 악기 외의 다른 악기의 좋은 연주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지만 더욱 더 많은 트롬본의 명인, 호른의 명인, 타악기의 명인들이 나와야 한다.
 
또 한 가지는 많은 연주자들이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솔로 커리어를 훨씬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한 오케스트라가 국제적 경쟁력이 있으려면 웬만한 솔로이스트 뺨치는 실력이 있는 연주자들이 다수 들어와 있어야 한다. (현재 서울시향에 이런 연주자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려면 음악교육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실내악이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것의 가치를 높게 인식시켜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량 있는 한국 음악가들이 국내에 정착해 활동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서울시향이 법인화되어 새출발한 지 7년 밖에 안된, 아직 과도기에 있는 단체라는 것이다. 조직의 시스템이 개선되고 실력이 향상되어 견고하고 튼튼한 단체가 되려면 아직 많은 노력과 지원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만일 지휘자 정명훈이 떠나면 서울시향이 흔들릴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책임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에서 ‘큰일이다’라는 결론보다는 ‘그래서 이 사람이 지금 필요하다’라는 결론을 내려보자.

고매한 인격을 담은 C장조의 화음과 정치적 올바름으로 연주되는 파사칼리아의 주제는 어떻게 들릴까?

이번 논란 중 인터넷 상으로 많이 논의된 것이 예술가의 인간성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사실 이런 식의 논쟁이 지휘자 정명훈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것 자체를 이해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이런 논쟁은 그의 인간성과 정치적 행보가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논란을 제기한 사람들이 그것의 증거로 내놓은 팩트들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나는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그동안 국내외의 ‘공인’들을 상대할 기회가 많았다. 내 눈에 그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자기 생각을 꾸미지 않고 거침없이 얘기하는 사람과 상대방이 듣고 싶어하는 얘기를 해주는 사람이다. (지휘자 정명훈은 아마 전자에 속하는 것 같다.) 
전자는 남들이 자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 별로 신경쓰지 않아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다. 후자는 항상 고도의 ‘전문성’으로 사람들을 대해 좋은 인상을 주고, 상대방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어떤 상황에서도 ‘옳은 말’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을 위해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는 경우도 있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대중을 대하는 것은 일종의 ‘테크닉’이다. 이 두 부류 중 누가 더 인간성이 좋고 인격이 고매한지 판단할 수 있을까?
 

나치 부역 의혹을 받았던 독일 지휘자 푸르트벵글러



더 나아가서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역사적으로 훌륭하다고 여기는 인물들이 다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을까? 바그너가 착한 사람? 쇤베르크의 인간성이 따뜻해? 카라얀은?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내가 틸레만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연주를 들을 때 그의 인간성은 나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나는 그 사람을 친구로 삼을 생각도, 데리고 살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훌륭한 연주를 한 음악가가 연주 후 악기를 놓는 순간 개로 변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런 현상은 현기증 나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그 인간에 대한 평가와 음악에 대한 평가는 철저하게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추상적인 것이고 선악과는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음악가가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러시아의 한 유명한 지휘자와 미국의 한 유명한 지휘자는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저질렀다. 전자는 법의 처벌을 받고 있고, 후자는 막강한 변호사팀을 고용해 자신의 범죄가 바깥 세상에 회자되는 것을 막고 있다. 
범죄자는 당연히 처벌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에 대한 처벌은 법으로 할 수 없다. 이것은 각 개인이 그 두 가지를 저울로 재서 판단할 문제이다. 나는 위 두 지휘자의 음악을 안 듣는다. 그들의 음악이 그들이 저지른범죄를 용서하면서까지 들어야 될만큼 특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예술가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도 한 예술가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총과 칼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를 등에 업고 자기 커리어를 쌓으며 인명 살상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는 정도가 아니라면, 최소한 그 사람이 특정 정당의 홍보대사로 나서서 그 당의 이데올로기를 전도하며 자신과 정치적 이념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있다는 증거 정도는 있어야 한다.
단지 특정 정치인에 의해 영입되었고 그의 취임식에서 지휘봉을 건네며 환하게 웃었다라는 것은, 그 사람을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람으로 도장찍기에는 많이 빈약하다. (정명훈은 그 특정 정치인이 다른 당 소속이었어도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논쟁이 시작되면 항상 단골 손님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푸르트벵글러이다. 그가 나치와 히틀러에 ‘부역’했다는 것이다. 
사실 푸르트벵글러는 나치 집권 시기에 망명하지 않고 독일에 남아 계속 활동을 했고 괴벨스의 프로파간다 부서의 산하단체였던 제국음악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베를린 필이 그의 지휘하에 두어번 나치전당대회에서, 또 히틀러의 생일 전날 연주회를 했다. (이 자리에서 히틀러와 같이 찍힌 그의 사진이 어떤 자료보다도 더 폭탄같은 힘을 가지고 그가 ‘부역’했다는 증거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부역자’로 단순하게 몰아가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푸르트벵글러는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라는 지휘를 이용해 당시 수석이었던 시몬 골드베르크 등 많은 유대인 연주자들이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을 막았고, 그 중 몇 명을 심지어는 자기 집에 숨겨주기도 했다 한다.
그래서 그 당시 문화국장이었던 게오르그 게룰리스가 문화국 고위간부였던 한스 힝켈에게 "푸르트벵글러의 도움을 받지 않는 유태인이 하나라도 있다면 이름을 대봐라"라며 극도의 불만을 토로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비단 유태인뿐만이 아니라 나치의 이념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독일인 음악가들도 그의 보호를 받았다 한다.
 
1933년 만하임에서 열릴 베를린 필의 연주회 전, 단원중에 유태인이 너무 많다고 항의가 들어오자 (말하자면 베를린 필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다) 그 연주회를 즉시 취소했으며, 이런 반유태인 사상이 팽배해있는 한 이 도시에서 다시는 연주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이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항의하는 편지를 괴벨스에게 보내 (이 편지의 전문은 1933년 4월 11일, 12일자 베를리너 타게스블라트 1면에 게재되었다), 나치당으로 하여금 유태인 음악가들의 오케스트라 연주를 금한다는 소위 ‘아리아법’을 철폐하도록 했다. 
같은 해 그가 나치가 금지한 작곡가 힌데미트의 ‘화가 마티스’를 초연하자 나치정권의 그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고, 푸르트벵글러는 그것에 대해 항의하고 힌데미트를 변호하는 공개서한을 또 신문에 발표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939년 다시 복직되어 베를린 필로 돌아온 후에도 그는 의도적으로 유태인 솔로이스트를 초청했고(물론 그들은 오지 않았지만), 아리아인이지만 유태인 배우자를 둔 단원들이 그의 도움으로 수용소로 끌려가는 운명을 면할 수 있었다 한다.
종전후 미 군정에 의해 활동을 금지당한 그는, 아무리 끔찍한 정권이 날뛴다 해도 망명하지 않고 남아있음으로써 독일 음악의 전통을 이어가고 자신의 위치와 영향력을 통해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싶었다, 라고 했다고 한다.
 
푸르트벵글러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의견들을 담은 저서가 많이 나와있다. 그 중에는 에버하르트 슈트라우프가 쓴 책같이 그가 나치에 부역한 기회주의자로 해석되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글 중에 많은 것들이 부정적인 팩트를 과장해서 표현해 푸르트벵글러라는 신화를 뒤흔들어 글쓴이 자신이 부상하려고 하는 불순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 자신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한다.
그리고 그는 이미 1930년대에 국제적 명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휘자로 일하기 위해,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굳이 독일에 남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가 토스카니니의 후임자로 뉴욕 필에 가게 되었을 때 나치당의 권력자였던 괴링이 그가 베를린 오페라 상임이 될 것이라는 헛소문을 의도적으로 흘려 그것이 성사되지 못하게 했다 한다.)
물론 나치 정권은 그와 베를린 필을 아리아족 최고의 예술단체로 선전에 어느 정도 이용했다. 하지만 그 당시 베를린 필은 주식회사와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해 오다가 거의 파산 직전에 있었고, 나치 정부의 도움을 받아 희생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어떤 정치적 상황에서도 독일 음악의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물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만일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려 전자는 망명하고 후자는 자진해산 했다면, 나치 정권 당시 살았던 독일의 일반 국민들은 그들의 음악을 향유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오늘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독일 음악의 전통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푸르트벵글러는 나치 정권에 이념적으로 동조하지 않았고 나치 정권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괴벨스가 그 당시 어떠한 권력을 휘둘렀는지 생각해 보면 그에게 공개적으로 항의편지를 보낸다는 것은 마치 자신의 사형선고에 스스로 서명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하지만 그는 나치 정권이 만든 중요한 인물 명단 중 가장 중요했던 ‘신의 은총을 받은 3인의 독일 예술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나치 정권조차도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레니 리펜슈탈

레니 리펜슈탈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녀는 아주 적극적으로 나치당과 히틀러에게 다가가 그들의 이념을 선전하는 많은 영화를 만들었다. 추상적인 음악과는 달리 영화라는 것은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그 선전효과는 훨씬 더 폭발적이다.
6백만명의 유태인들과 수천만명의 유럽인들이 전쟁을 통해 목숨을 잃었지만, 자신은 101세까지 장수를 누렸고, 평생 자신의 정치적 행보를 합리화하는 위선을 보였다.
독일 사회에서는 그녀의 정치적 행보를 철저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그녀의 영화를 만드는 능력에 있어서는 그것과 상관없이 인정할 것은 인정한다. (물론 그녀의 예술적 감각은 우리 시대와 맞지 않지만.)

나치 정권하에서 활동하며 권력을 휘둘렀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음악이 나치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음악 중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음악 때문이지 그의 정치적 행보 때문이 아니다.

예술가들의 정치적 행보가 그들의 예술가로서의 능력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 없고, 이것은 또 거꾸로 보면 그들의 예술적 업적이 정치적 행보를 합리화해줄 수도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던 두 지휘자의 음악이 너무 훌륭해서 누군가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듣는다 해도 그것이 그들의 범죄에 대한 면죄부는 될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16세기 작곡가 제수알도는 심지어 살인자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예를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별로 마땅치 않다. 오랜 시간이 지난 범죄에 대한 비판의 잣대는 느슨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의도치 않게 글이 장황하게 되어버렸지만 내가 하고 싶은 얘기의 요지는 우리나라가 엉뚱한 등식을 통해 사람을 비난해, 예술가로 하여금 이념과 도덕의 눈치를 보게 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된다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