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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진은숙이 본 ‘정명훈 논란’(4) -내 동생 진중권과 작가 김상수

진중권

내 동생이 이 논란 중에 지휘자 정명훈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는 얘기를 시향을 통해 들었을 때 나는 매우 놀랐다. 어떤 사람들은 내 수입원이 끊길 수도 있다는 데에 화들짝 놀란 진중권이 황급히 달려들었다는 자유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어떤 사람들은 ‘형제애’라 판단한다.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우리 부모님이 들었다면 기절초풍할 노릇이다.) 믿을 수 없는 얘기겠지만 난 그 당시 동생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논란이 계속되는 수 주 동안 단 한번도 통화하거나 만나지 못했다.
우리 집 삼남매가 (원래는 4남매지만) 집단행동을 하는 것을 본 사람은 대한민국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셋이 같이 인터뷰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요청이 여러 번 들어왔지만 단 한번도 응한 적이 없고 우리 셋을 같이 보여주는 단체 사진도 없다. 내가 한국에 들어와서 활동했던 초기에는 몇 년 동안 심지어는 우리가 남매라는 것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다 개인주의자이며 자유주의자이다. 반경 10킬로미터 이내로의 접근은 서로 견디지 못한다. ‘궁지에 몰렸으니 글 좀 써줄래?’라는 말은 우리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동생이 얼마 전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단 한번도 공개석상에서 동생을 옹호한 적이 없다. 
몇년 전 동생이 지방 어디에서 강연장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다급하게 전화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인사동에서 맛있게 밥을 먹고 있었다.) 내 반응은 단 한 마디 ‘알아서 잘해봐’였다. 그렇기 때문에 진중권은 내가 시향에 몸을 담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김상수 씨의 생각에 공감한다

나는 독일에서 27년, 베를린에서만 24년이라는 시간을 살았다. 한국에서 산 24년보다 더 오랜 시간을 독일에서 산 셈이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김상수 씨 칼럼을 통해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히틀러 같은 정치가가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것이다. (독일 정부가 발칵 들고 일어날 일이다.) 
그는 독일에 체류하는 나보다도 더 독일에 대해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지휘자들의 연봉에 관한 것이다.

베를린 필의 공연 모습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김상수 작가가 베를린에 체류한 적이 있었고, 어느날 지하철에서 우연히 사이먼 래틀을 봤다고 한다. 설마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자. 5만9천유로를 연봉으로 받는 사람이 어떻게 감히 택시를 타겠는가?
나는 몇년전 유아용품 파는 가게에서 세일을 할 때 어린 아들 요나쉬를 데리고 나온 래틀 부부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그 당시에 나는 왜 이렇게 세계적인 지휘자가 이런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가 의아해 했다. 하지만 지금 그 답을 얻었다. 바로 연봉 때문이었다.
 
김상수 씨가 서울시향이 베를린 필 같이 운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나는 ‘한국이 독일인가?’하며 잠시 갸우뚱했다. 나는 이 두 나라와 두 오케스트라를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한번도 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를 머리 속에서 연결시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의 주장은 나에게 마치 남북통일을 독일 통일의 방법을 본따서 하자라는 주장같이 들렸다. (국경이 자연스럽게 열리고 쓰나미같이 넘어오는 북한 주민 하나하나에게 환영비조로 10만원씩 지불하는 것으로 통일의 사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글의 정연한 논리에 금방 설득당했다. 베를린 필은 너무나 훌륭한 악단이다. 그래서 나는 서울시향을 베를린 필 운영방식으로 이끌어나가야 된다는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국가에서 서울시향의 예산을 10배쯤 늘려주고, 외국 유수 오케스트라들도 다투어와서 연주하고 싶어하는 음향 좋은 번듯한 전용 홀을 지어준다. 많은 전문인력이 투입되어 행정이 원활해지고, 튼튼한 예산으로 매해 편안하게 해외투어를 나간다고 상상해보자. 얼마나 환상적인가?
베를린 필을 포함한 모든 다른 독일 단체들의 시스템은 이 나라의 역사와 사회구조, 그리고 국민들의 멘탈리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내 생각에는 서울시향이 베를린 필 같이 되려면 한국이 독일같이 바뀌어야 한다. 

독일은 물론 좋은 나라이다. 신문사 편집장들이 신문이 인쇄에 들어가기 전에 기사의 팩트를 철저하게 검증하고, 발행된 후 숫자 하나라도 실수가 발견되면 즉시 정정기사를 내보낸다. 타인을 비방하는 내용의 글은 그것이 단 한 문장이라도, 단어 한 개일지라도 글쓴이가 법의 처벌을 받던가, 최소한 공개사과하며 책임져야 한다.
좌파 정치인들도 다니엘 바렌보임과 사이먼 래틀의 연봉이면 영세민 아파트를 몇 채 지을 수 있다는 엉뚱한 계산을 내놓지 않는다. 우파 정치인들도 왜 우리의 세금으로 수많은 외국인 학생들을 공짜로 공부시키냐며 불평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통일 후 발생된 빈부격차와 사회빈곤층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베를린 필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시도는 문제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선가게에서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이 내 앞에 줄을 서도, 국회의장을 슈퍼에서 만나도,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거나,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다가가 여기에 싸인해라 저기에 서명해라 하지 않는다. 한국이 이렇게 된다고 상상해보자. 얼마나 환상적인가.

독일은 좋은 나라다. 어떻게 하면 한국이 독일처럼 될 수 있을까? 
이런 변화를 정치나 이데올로기를 통해 기대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그렇게 되려면 한 개인 개인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남들에게 오만하게 당신들을 바꿔라 라고 요구하기 전에, 나와 김상수씨,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바꿔보자 감히 제언한다.

에필로그

나는 김상수 작가의 이름을 이번 논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내가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고로 한국 주요 매스컴을 대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지난 몇 주 동안 그의 서울시향과 정명훈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열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단순히 ‘팬의 애정’이라고 보기에는 좀 지나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애인이 있으면 좋지만 지나치게 집착을 하면 짜증이 나기 마련이다.)

한번 상상을 해봤다. 작곡가 진은숙이 어느날 갑자기 쓰던 작품을 미루어놓고 임의의 공공기관, 예를 들자면 한국은행의 경영구조를 비판하고 나선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급여를 내 자신만의 산수법으로 확대, 축소시키며 부당함을 호소하고, 그것의 해결책을 여러가지 변주곡으로 제시한다. 더 나아가서는 화폐통용의 시대는 이미 지났고 이제 물물교환의 시대가 와야 한다며, 그런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위해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총재는 걸림돌이 되니 갈아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김상수 씨는 자신이 작가이기 때문에 이런 비교가 타당하지 않다고 얘기할 것이다. 그러면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예술가나 작가, 즉 창작행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이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김상수 씨는 그간 많은 사람들을 만나 자료를 수집하고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해 서울시향과 정명훈에 대한 방대한 양의 글을 썼다. (사실 그 글들은 서울시향과 정명훈에 대한 정보보다는 글쓴이 자신의 사고 구조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담고 있기는 하다.) 그는 그 글을 발표하기 위해 여기저기 매체를 찾아다니고 수많은 댓글에 성실하게 답변해왔다. 거기에 쏟은 그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 열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서울시향을 구하기 위해 잠시 창작에 손을 놓으신 걸까? 
아니면 서울시향과 정명훈이 등장하는 거대한 작품을 구상중이신가? 
 
나는 김상수 작가가 본업에 충실해 훌륭한 작품을 남기기를 바란다.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도 음악을 뒷전으로 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이 나에게 잃어버린 시간이듯이 그에게도 작품을 쓰지 않는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이 되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