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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진은숙이 본 ‘정명훈 논란’(4) -혈세와 '상위 1%'

혈세와 상위 1%

인터넷 공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왜 시민의 혈세를 상위 1%를 위해 쓰냐고 비난하는 것을 읽었다. 서민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일반 사람들에게 억, 억, 소리가 나는 서울시향 예산과 상임지휘자 연봉에 대한 논란은 괴리감을 느끼게 하기 충분하다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서울시향의 활동이 상위 1%들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서울시향 음악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그 중에는 부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마스터클래스에서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도 형편이 넉넉치 않은 학생이 여럿 있다. 또 서울시향은 ‘찾아가는 음악회’를 통해 부유층이 아닌 보통사람들에게 무료로 음악을 선사하고 있다.
 
서울시향의 음악을 (말하자면 서양의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사람의 수를 굳이 전체 인구에 비교해 1%라 하자. 서울시는 시민들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1%를 위한 사업을 50개를 하면 50%를 위한 것이고 100개를 하면 100%를 위한 것이 된다. 100%를 위한 사업만 해야 된다면 매일 도로공사만 해야 된다는 말이다.
시민의 세금(혈세라는 말은 너무 과격해서 세금이라 하겠다)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써야 된다는 사실은 너무 명백하다. 하지만 개중에는 ‘내 돈을 왜 나하고 상관없는 데 쓰느냐’는 식으로 과격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독일에서 독일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공부했고, 지금은 일을 하며 세금을 내고 있다. 내가 낸 세금은 어디론가 흘러들어가 누군가를 위해 쓰여질 것이다. 이것은 한국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위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낸 세금이 쓰일 수도 있다. 이것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일종의 약속이다. 
그리고 내가 잘 몰라도,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라도 그것의 존재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돈, 돈, 돈

위의 제목은 연봉에 대한 인터넷 공방 중 한 네티즌이 올린 댓글이다. 인터넷을 포함한 한국 언론에서 항상 느껴왔던 것은 돈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은 존경심과 부러움과 시기심의 대상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멸시와 무시의 대상이 된다.
언론에서는 매일 누가 얼마를 벌었고, 얼마를 투자했고, 얼마를 사기쳤고, 얼마를 횡령했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어떤 사고로 유족이 얼마의 보상금을 받았다는 기사의 댓글에는 나에게도 저런 행운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부러움이 담겨져 있다.


 
한 개인의 명예나 존엄성이 짓밟히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누군가가 돈에 관련해 구설수에 오르면 사람들은 촉각을 세운다. "누가 얼마"하는 순간 벌써 사냥은 시작되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범죄였는지 아니었는지, 행정착오였는지 오해였는지 상관없이 당사자들은 도덕적 치명상을 입는다. 중죄에도, 불법주차에도 똑같이 종신형이 선고되는 일과 같은 것이 서슴지 않고 벌어진다.
이번 논란이 음악을 모르는 일반사람들에게까지 강력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논란의 원인이 돈이라는 것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번 논란 중 언론에 김상수씨가, 내가 서울시향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마치 내가 부당이득을 취한 것같은 발언을 한 것에 대해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물론 내가 당한 부당함은 정명훈이 당한 부당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해명하고 싶지 않다.
나에게는 그런 발언에 불쾌함을 보이는 것조차도 그가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글을 썼다는 행위 자체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문제를 제기할 아무런 의무도, 자격도, 권리도 없다. 
(만일 일반 사람들이 내 수입이 그가 주장하는 것에 못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내 스스로에게 질문해봤다. 솔직히 나는 내 몸값을 5억원까지 올려준 한 이름모를 네티즌에게 감사한다.)

단지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많다, 적다’라는 것은 비교의 대상이 필요한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 비교의 대상이란 그 당사자가 하는 일과 의무와 책임이다. 이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숫자만 가지고 그런 판단을 내리는 것은 부당하다. (김상수 씨에게 정명훈의 지휘는 그저 손을 흔드는 것이고, 내가 하는 일은 그저 현대음악을 큐레이트 하는 일이다.) 수입에 부당하고 타당한 절대적 숫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많다, 적다’라는 판단은 일단 그 사람의 일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그의 정신적 혹은 육체적 노동으로 존중하고 인정하며, 그 사람이 그 일을 통해 한 단체와 사회에 어떠한 책임을 지고, 어떠한 영향을 주느냐가 고려된 상태에서 내릴 수 있는 판단이다.
이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 즉 회사원, 공무원, 노동자 등 인간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숫자에 차이가 있다고 원칙이 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상천외한 세 가지 주장

지휘자 정명훈의 체류기간에 대해 논란이 일어났다. 그가 112일 밖에 한국에 체류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임지휘자 자격이 없다 한다. (나는 그가 112일씩이나 한국에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심지어는 비행기를 타고와서 지휘를 하는 게 말이 되냐 한다. (그러면 배를 타고 와야 한단 말인가?)
물론 아무도 그를 불러주지 않는다면 그는 365일 한국에서 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논란을 제기한 사람은 얼마 후 여론을 의식했는지 그의 체류기간을 ‘최소한 5개월’로 관대히 내려줬다.

지휘자들은 원래 신출귀몰하는 존재들이다. 오늘 베를린에서 리허설, 내일 아침 파리에서 드레스 리허설과 저녁 공연, 모레 아침 런던에 갔다 오후 늦게 다시 베를린으로 와 리허설을 하는 식이다. 그렇게 바쁜 사람이 112일 있는 것에 불만이 있다면 그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지 못하도록 계약서에 다음 조항을 넣자.
"서울시향 상임지휘자는 계약시 여권을 압수하고 출국 정지 시킨다."

정명훈은 너무 비싸니 작곡가 진은숙이 저렴한 가격에 지휘를 하면 안되겠냐는 얘기가 나왔다 한다. 나도 몸값이 꽤 비싼 사람이다. 서울시향 스태프들 중 음대 출신이 꽤 된다. 그들 중 누군가가 상임지휘자를 하면 훨씬 더 저렴하게 할 수 있다.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정명훈 소개글

 

지방 어디에서는 왜 지휘자가 대통령보다 더 많은 돈을 받느냐 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고 한다. 지휘자의 몸값은 국제적 무대(혹은 시장)에서 형성된다. 하지만 정치가에게 국제적 시장이란 있을 수 없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민주화를 이룬 훌륭한 정치인을 중동이나 아프리카로 수출해 민주화를 이루게 하고, 얼마만큼 공적이 있느냐에 따라 그들의 몸값이 정해질 것이다. 그러면 이런 정치가들을 위한 국제적 매니지먼트가 생겨 더 능력있는 정치가와 계약하기 위해 서로 경쟁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정치가는 임기에 따라 교체가 가능하고 그들의 권력은 그 나라의 국경을 넘는 순간 소멸된다. 국빈 대접을 받고 협상을 할 수는 있어도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직책을 맡았느냐를 떠나서 한 예술가의 절대적 가치와 위치는 그 스스로가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평생을 거친 스스로의 연마를 통해 도달한 것이고 아무도 그를 거기서 끌어내리거나 해고할 수 없다. 이것이 예술가와 정치가의 차이이다.
프란츠 리스트가 살았던 시대에는 음악가들이 하인 취급을 받아 뒷문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리스트는 당당하게 정문으로 출입했고, 자신의 연주중 잡담하거나 낄낄거리며 웃거나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대는 왕족과 귀족들을 서슴지 않고 나무랐다 한다. 왕족과 귀족은 얼마든지 있지만 리스트는 유일하기 때문이다. 

베를린 필 식의 지휘자 선발

서울시향도 베를린 필같이 여러 지휘자를 초청해 경합을 시키고 단원들의 투표로 상임을 뽑아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그렇게 한다고 상상을 해보자. 누구를 데려올까?
정마에가 홍마에, 문마에, 이마에(이들은 물론 가상의 인물들이다) 등과 경합을 한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정마에와 서울시향이 자존심 상하지 않기 위해 최소한도 클라우디오 아바도, 베르나르트 하이팅크와 다니엘 바렌보임을 데려오고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카라얀을 무덤에서 꺼내오자.
 
연봉을 차치하더라도 과연 이들이 오려고 할까? 만약 온다면 현재 정마에의 조건으로 계약하려 할까? 
 
그들은 엄청난 보수를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그 엄청난 보수를 최소한도 50억이라 가정해보자. 이들 중 누군가가 50억을 받고 상임지휘자로 일을 해도 그에게 서울시향이 발전하는 것이 중요할까? 이들이 진정으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할까?
그리고 만일 그 경합에서 정마에가 뽑힌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연봉도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에 정마에에게도 50억을 지불할 것인가? 
 
외국 지휘자가 뽑히면 50억, 정마에가 뽑히면 13억? 이것은 명백한 사대주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