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차별의 음식

라이너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이제는 고전에 속하는 명화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독일인 청소 노동자로 일하는 중년의 여자가 우연히 북아프리카의 아랍계 이민자인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주위의 비아냥에도 이들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소한 충돌로 균열이 생기고 그들의 사랑도 비극을 맞는다는 얘기다. 마침 뮌헨올림픽에서 벌어진 선수촌 테러사건으로 아랍인에 대한 차별이 극에 달하던 시점에 나온 영화여서 더욱 화제를 모았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인종과 나이를 극복하고 사랑하던 주인공들의 관계가 파장을 맞게 된 ‘사소한’ 사건은 바로 음식에서 시작된다. 어느날 청년은 ‘아내’에게 쿠스쿠스가 먹고 싶으니 만들어 달라고 한다. 그러자 아내는 뜻밖에도 절대 안된다고 거절한다. 둘 사이에 내재되어 있던 갈등이 음식을 통해서 폭발하고 청년은 집을 나간다.



감독이 이질적인 두 문화의 충돌을 다루면서 면전에 꺼낸 것은 바로 쿠스쿠스라는 음식이었다. 노란 좁쌀처럼 생긴 이 곡물은 생선이나 고기, 향신료를 넣고 주로 찜을 해서 먹는 요리다. 이국적인 향이 매혹적이지만 서방에서는 아랍의 상징으로 비치기도 한다. 감독이 쿠스쿠스를 선택한 것은 그런 상징성을 차용한 것이다. 음식은 한 민족의 특성을 단순화시키는 데 동원된다. 한국인이 흔히 김치로 상징되는 것처럼 말이다. 한 이질적 민족 집단을 경원시할 때 흔히 어떤 음식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이 영화에 등장하는 쿠스쿠스처럼 차별의 상징으로 선택되는 건 대단히 불쾌한 일이다. 유럽에서 활약하는 박지성의 응원가에 개고기가 등장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자기 팀의 훌륭한 선수에 대한 애정 표현의 한 방식으로 정리하고 넘어가고 말았는데, 그렇더라도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음식처럼 포비아, 즉 경원과 공포의 대상으로 자주 거론되는 것도 드물지 않은가 싶다. 우리 유전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에 대한 본질적인 거부감이 들어 있다. 진화의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자연스럽게 체득된 것일 게다.



그러나 문명사회에서 충분한 정보를 접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포비아를 발동하고 노골적으로 배척하곤 한다. 고수가 바로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우리가 동남아나 중국, 그리고 중국에서 온 동포들에 대해 서구인과 같은 대우를 하지 않는 이중성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비열한 태도에 자주 등장하는 소도구가 고수다. 고수를 마치 우리가 먹지 못하는 어떤 물질로 이해한다. 불편한 음식을 먹지 않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하의 대상이 돼서는 안된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고수가 결코 우리가 먹지 않던 음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전에 고수김치를 담가 먹었고, 나물로 쓰던 작물이었다.



(경향DB)

이탈리아에 있을 때 몇몇 현지인들이 기분 나쁜 말을 하곤 했다. 중국인에게는 파 냄새가 나고 한국인에겐 마늘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정말 기분이 더러웠다. 차라리 눈이 찢어졌다는 말이 낫다고 생각했었다. 한국은 이미 다민족 사회에 진입했다. 그들을 포용하지는 못할망정 무슨 음식이나 식재료를 거론하며 차별하는 짓은 하지 말자.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김치녀’ ‘된장녀’ 같은 말을 동족에게도 내뱉는데, 무슨 말인들 못하랴 싶어 두렵기만 하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